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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7. 2019

달고나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 있던 달고나

 어릴 적 동네 골목마다 달고나 좌판이 있었다. 가격은 한 국자에 5원이었다가 나중에 10원으로 인상되었다. '달고나 값 인상 사건'은 당시 고속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 해도 너무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도 구경꾼 자격으로 그 판에 낄 수가 있었다. 이때 풍경이 김홍도의 '씨름판'이라는 그림 같다. 다들 연탄 화로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으니.


 '달고나 제작과정'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공연이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물속에 담가놓았던 찌그러진 양은 국자를 꺼낸다. 먼저 연탄불에 국자를 올려놓고는 누런 설탕 한 수저를 넣는다. 이때부터 뜨거운 불 위에서의 용틀임이 시작된다. 설탕이 졸아들면서 국자 가장자리에 있던 설탕이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젓가락으로 휘저어주면 설탕이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설탕이 까매지기 직전, 이때가 이 판의 백미다.


 소다가 설탕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갈색이 순식간에 뽀얀 색으로 변하면서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니. 이때야말로 노련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국자에서 설탕이 흘러넘치지 않게 철판에 '뿌려 펼치기 기술'이다. 타이밍이 조금만 빨라도 안 된다. 또 조금만 늦어도 설탕이 국자 밖으로 흘러넘쳐 국자 안에는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철판에 뿌려진 '변심한 설탕'. 그 위로는 둥그런 쇠 누름 판이 다가온다. 동그란 모양의 달고나가 아직까지는 말랑말랑하다. 그 위에 재빨리 각종 모양의 쇠틀을 찍는데, 그 부분이 반쯤 잘리면서 떼어내기 좋은 상태가 된다. 곧이어 달고나 전체를 철판에서 조심스레 떼어낸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면서. 납작한 원형 그대로 잡고는 열기를 식혀서 달고나 주인에게 준다. 이때 달고나 주인이 모양 그대로 따오면 달고나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었다. 편의점의 1+1 같다.


 달고나판에는 다양한 재밋거리가 있었다. 달고나 하나를 덤으로 주는 건 사람 모양 등 모양 따내기가 가장 쉬운 것이었고, 모양이 좀 더 복잡한 건 상금까지 걸려있다. 달고나 가게마다 다르긴 해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별 모양은 상금이 50원이었던 것 같다.(이런 유형문화재 관련 자료는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상금이 탐났던 우리는 별 모양 따기에 너도 나도 도전했다. 별 모양을 따 보겠다고 어린아이 수준의 가산을 탕진하기도. 도박중독과 비슷하다.


 하지만 별 모양은 ‘별’의 영역이었다. 하늘의 별처럼 우리 손에는 잡히지 않았으니까. 이번엔 진짜 성공인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뚝 부러졌다. 작고 뾰족한 다섯 개의 삼각형 끝을 대체 어떻게 종이처럼 오려내나. 그때 우릴 보았다면 검투사의 눈빛과 결기를 느꼈으리라. 번쩍거리는 긴 칼로 무장하고는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덤벼들 듯 도전하곤 했으니. 아주 얇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를 상대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전투장은 회전율이 낮았다. 무엇보다 달고나 한 국자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대용량 냄비로 만들고 달고나 한판에 여러 개 찍어서 팔아도 될 것을.) 대형 매출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공짜 손님도 많았다.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구경만 하는 아이들 말이다. 게다가 이 손님들은 일찌감치 맨 앞줄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판에선 10원짜리를 가져야 VIP 취급을 받았다. 아무리 R석에 있던 아이라도 금화 고객이 등장하면 슬쩍 어깨를 비틀어 비켜 줘야 했으니까.


 바글바글한 무리 속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달고나 아주머니를 공포에 떨게 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집 가까이 살던 사촌 언니였다. 당시엔 달고나를 먹기 위해서보다 모양 뽑기를 하 기 위해서 달고나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사촌 언니는 어려운 별 모양도 몇 번이나 성공했다. 사촌언니에겐 언니만의 특급 비법이 있었다.  늘 비법이 궁금했던 나는 혈연을 활용해서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어느 날 언니가 내 귓속에다 조심스레 영업 비밀을 풀어주었다. 이제 드디어 두 명이 된 것이다. 달고나 뽑기 비법의 도사와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자.


 사촌언니가 가르쳐준 비장의 무기는 바로 집에 있는 바늘이었다. 달고나를 바늘로 정교하게 쪼아대었다. 특별히 가장 난이도가 높은 별 끝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조금씩 녹여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비법도 누군가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기술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주머니는 별 모양을 누구도 성공 못할 거라 생각하신 게 분명하다. 50원이라는 비현실적인 상금을 보면.(당시 50원은 어린아이들에게 꽤 큰돈이었다.) 큰 상금으로 고객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걸 진짜로 뽑아올 줄이야. 아주머니는 사촌언니가 별 모양까지 접수해버리자 꼼수를 발휘하셨다.


 달고나 모양 틀은 끝이 열려있었다. 아주머니는 별 모양 철판 끝을 더 오므렸다. 슬롯머신 조작행위라고나 할까. 그렇게 하면 별 모양의 삼각형이 더 가늘고 뾰족하게 변했다. 모양 따내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여기서 달고나 신은 포기 했을까. 아니다. 그녀는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그 모양도 결국 성공했다. 그녀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사촌언니가 달고나 판에만 다가오면 기겁을 했다. 언니가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부리나케 다가가서 막후 협상을 했다. 다른 아이들 안 보게 10원짜리를 언니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이 돈을 줄 테니 제발 다른 동네에 가서 하라면서.


 '달고나 신'은 통 크게 수락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종잣돈들 덕분에 다른 동네로 가서 매일 달고나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 동네마다 비상이 걸렸다. 요즘으로 치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나 보다. 그 언니가 나타나면 달고나 아줌마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니. 그 후로 언니는 모든 동네를 통틀어서 ‘전설’이 되었다. 우리에겐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 후로 범접 못할 광채가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요즘도 종종 달고나가 생각난다. 머릿속이 작은 서랍으로 되어있다면 어떻게 될까. 평소 몇 가지만 기억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해야 한다면. 나는 그 몇 가지 중 ‘달고나 판’ 고를 것이다. 달고나 판을 그 풍경 그대로, 냄새까지 통째로 넣어두겠다. 항상 내 기억 저편에 고이 재워둔, 동전 한 닢 없이 하루 종일 구경만 해도 누가 뭐라지 않던, 우리 가난했던 놀이판의 풍경을. 길바닥 흙냄새에 비벼진, 달큼한 울렁거림을.


 왜 어릴 적 추억하면 코끝에 달고나 향부터 나는지. 아이들이 단 것을 좋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구멍가게도 달큼한 향으로 기억되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어른이라서 그런 건지도. 시고, 쓰고, 짜고, 매운 것들에 둘러싸일 때마다 머릿속 서랍을 열어 달디단 풍경 속으로 냉큼 달려가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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