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실수를 했다면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다가 손마저 젖는다.

by 허윤숙

한 번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말실수'를 엎질러진 물에 비유한다. 전에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무안을 당한 적이 있다. 지인은 좌중을 웃기려는지 나를 대상으로 농담을 던졌다. 순간 사람들 표정이 싸해졌다. 당사자인 나는 물론이고. 그러자 돌아가서 마음이 불편했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오늘 실수한 것 같아요. 그 말은 안 했어야 했는데, 그렇죠?"

그 말을 듣고,

"그래요. 좀 실수했어요. 그 말을 듣고는 내가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알아요?"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요?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뭘 그러세요? 호호호."

속이 쓰리지만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다시 안 볼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실수가 맞다고 말하기엔 내 자존심이 상하고,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애매하다.


종종 말을 해 놓고 자기가 '실수한 것 같다'라고 나중에 말하는 사람이 있다.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렇다.


'그래. 맞아. 실수한 거.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지. 자기가 실수한 걸 잊어달라는 건가? 아무 일 없던 걸로? 지우개로 싹 지우듯이? 그건 자기가 실수한 걸 인정하는 셈인데. 그게 나에겐 더 상처가 되는 걸 모르나?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오해했나?' 하고 말았을 텐데. 나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자길 나쁘게 볼까 봐서 그런가? 결국 자기도 그런 뜻으로 비칠 걸 알았다는 거잖아. 그런 감수성이 늦게 온 건가? 다음에는 그런 실수 안 하겠네. 그럼 나에게 전화한 건 다음부터 실수 안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인가? 그런데 가만 보자. 이렇게 굳이 나한테 말로 하는 이유는 뭐지? 자기 혼자 결심하면 될 것을. 나로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을 또 해야 하는 거잖아. 생각해보니 자기가 마음 편하자고 나에게 굳이 전화한 거네? 이렇게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그리고 자기가 살수한 것 같다고? 그래서 뭐? 미안하다는 거야 뭐야? 자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오해였다고? 변명이 목적이었단 말인가? 오해하게 한걸 용서해달라는 건가? 아니면 자기가 있는 사실을 말한 것 자체를 용서해달라는 건가? 진짜 헷갈리게 하네. 말하자면 자기 이미지는 관리해야 하고, 자기 마음의 찜찜함은 덜어내고 싶고, 그렇다고 꼭 나에게 자존심 굽혀가면서 사과할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뭐 그렇단 이야긴가? 진짜로 다음엔 보고 싶지 않아.'






한 관리자는 부임하자마자 직원들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처음 들었을 땐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몇몇 일을 겪고는 그 말이 가식인 걸 알게 되었다. 이미지 관리상 그 말을 남발한 것. 그래야 자기편을 만들 수 있으니. 조직마다 기존의 파벌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


그때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의견이 달랐다. 우릴 언제 봤다고 사랑하냐고. 먼저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하면서. 말로 실수한 후 뒷수습도 그렇다. 말보다는 행동이 낫다. 밥을 한 끼 사거나, 시간이나 노동이 들어가는 일을 도와주거나. 자신의 진심을 자연스레 알려 주는 것.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이 있다. 평소 말실수가 잦은 나는 속 편하게 전화로 사과하지 않는다. 좀 더 공을 들인다. 즉 만나서 내가 원래 경솔하고 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는 비굴한 '셀프디스'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이때 상황을 지어내기도 한다. 내가 남에게 실수했던 장면을. 그것도 상대방에게 내가 했던 실수를 살짝 비틀어서. 거기에 나의 잘못을 까발리는 것이다. 그러면 고해성사한 나는 속죄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처 입은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남에게 실수하면 집에 돌아가서도 기분이 찜찜해진다. 그때 혼자 괴로워하다가 전화기를 집어 든다. 혹시 내가 아까 그 말한 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냐고. 자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이때 미안해서라기보다는 자기 마음 좀 편해보자는 것이다. 반응도 살필 겸. 대꾸하면서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물없는 사이라면 웃고 지나칠 수도 있다.

"내가 그 정도로 속이 좁냐? 나는 기억도 안 나거든?"

실제로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머릴 조아리며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으니 남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앞지른 경우다.


사람에 따라 어투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게 하나 있다. 사과를 하려거든 구체적으로 사실을 말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자기 인격이 부족한 거니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사과를 하는 모습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 그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오히려 미안해 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보다는 자기가 마음 편하려고 말을 꺼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은 답이 없다. 손절하는 수밖에. 남에게 하는 말은 쿨하다 못해 무례한 사람이 있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 공감능력이 부족한 거다. 말실수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떤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이 한 말 한마디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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