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말에서 태어난다

사르트르의 '말'

by 허윤숙

사르트르의 '말'

노벨상을 거부해서 유명해진 자전적 회고록, '말'. 이 책은 사르트르가 어떻게 해서 문학을 접하게 됐는지 말하고 있다. 그에게 문학은 그저 풍토병이었단다. 촌철살인의 명문장 제조기인 그가. 그는 이 책으로 문학, 아니 '문학병'과 마침내 이별한다.


부르주아적이었던 그의 이미지가 갑자기 투박해져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그가 카뮈와 벌였던 격론은 당대에 이슈가 되었다. 당시 우울하고 서민적인 카뮈에 비해 사르트르는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였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유복자라는 것이나, 홀어머니가 외가에 얹혀살며 자길 키워낸 이야기가 솔직하게 그려진다.(처음 받아쓰기 시험에서 빵점 받는 장면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땅딸하고 못생겼던 그는 외톨이형 수재였다. 환경상 또래 친구가 없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에 서툰 아이. 그렇지만 어른들로 인해 한 껏 치장된 '자존심'. 막상 이를 둘 데가 없던 어린 사르트르.


높은 '자존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그 인데 말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시몬느 보봐르와의 동거나 유명 여배우들과의 끊임없는 연애, 그 인기는 어디서 왔으며, 논쟁을 벌였다 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자존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서재. 그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읽고 쓰면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나간 것이다. 그곳에선 키도 얼굴도 아버지의 부재도 문제 되지 않았다. 자신이 지어내면 되니까. 이 자서전은 그의 유년시절 이야기로 한정되어 있다. 그를 만든 게 그 무렵이었다는 말인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은 '말'에 대한 능력과 감각이 어떻게 생기는지 추적한 책이다.


유년시절은 말의 얼개가 형성되는 시기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이 상상하던 그가 어떤 단어를 써서 말을 했을까. 고급지고 사려 깊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를 바라보며 사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경이로움이었다. 이에 으쓱해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독서하고 사색을 이어나갔다. 그 말들은 그를 지탱하는 무기였고 갑옷이었다. 이를 통해서 어른들에게 선의를 도도히 베풀며, 마치 '신탁 왕자'같은 지위를 맘껏 누렸다.


이런 환경은 '문학병'을 부른다. 어른이 되어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하며, 참여문학 내지는 참여 정치에 관심을 기울인다. 순수문학을 사치이자 병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건 그의 객기일까.(순수한 사회 참여 의지조차 문학적 감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하지만 조지 오웰과 마찬가지로 당시 분위기상 사회 문제를 외면하고, 오롯이 순수문학에 빠지기는 힘들었을 듯.(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순수 문필가들이 원두커피를 내리며 낙엽 태우는 글을 쓸 때, 윤동주 같은 이는 자신의 안일에 자책하며 서시를 쓰고, 옥살이를 하다 죽어갔다.)


쉽진 않았나 보다. '문학병'을 떠나보내는데 9년이나 걸렸으니.('말'은 최초 집필에서부터 책으로 나오기까지 9년이나 걸렸다.) 다작을 하는 그로선 꽤 오래 걸린 셈이다. 이 책은 문학적 수사로 넘쳐난다. 이왕 보낼 거 든든히 챙겨 보낸 건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이 책의 집필은 그의 문학활동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또 결과물인 그의 유려한 필력은 이후 그의 정치적 참여 글에 강한 설득력을 준다.


특이한 성격의 이 자서전은 보는 각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자아 형성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하며 구간별로 단층촬영하듯이 써냈기 때문이다.


mri를 판독해보면, 그를 성장시키고 세워준 것은 '말'이었다. 조숙한 아이의 외로움이나 결핍은 내면에서 '말'로 자라났고, '말'로 둥둥 떠다녔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은 이내 '글'로 그 몸뚱이를 체현해낸다. 공기 중으로 증발되는 '말'들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추적하며 붙잡은 성과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쓴 글들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말'이 사물의 진수이며, 사물은 '말'에서 태어난다는 원초적 체험을 한 것이다. 이는 끊임없는 창작의 동기가 된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를 벗어났다.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든든히 지지해줄 아빠가 없던 그. 그에겐 오히려 보호해줘야 할 순진한 엄마나 노인들 뿐이었다. 그래서 강해져야 했고, 그것은 칼보다 강한 글로써 가능했다. 그가 했던 말을 보면 그가 글을 얼마나 사랑하고 끔찍이 가꿔왔는지 알 수 있다.


글은 말이라는 씨앗에서 틔우는 나무다. 그가 죽은 후로도 계속해서 멋진 나무 중 하나로 남아있는 그의 책 '말'. 그가 책 제목을 '글'이라고 하지 않고 '말'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글'을 썼지만, 결국 그건 '말'이기 때문이다. 외롭던 그가 사람들에게 걸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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