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I once belonged (II)
(A rainy day in New York, Directed by Woody Allen, 2019)
처음 뉴욕행 비행기를 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을게다. 그 대부분은 과학자로서의 목표 같은 거였겠지. 논문도 내고, 연구비도 따고. 이 목표에 수렴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랬을 거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국의 지인들은 나를 뉴요커라 했다. 그때마다 나는 뉴요커가 아니라 뉴욕주 신분증을 가지고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라 했다. 뉴요커라는 단어는 좀 유난스럽고 껄끄러웠다. 그저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면서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는, 그냥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 뉴욕으로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왔다는 새로운 마인드를 장착하게 된 게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것이 뉴요커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을 게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여러 종류의 불안한 감정들을 비로소 안을 수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좀 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고, 좀 더 큰 규모의 연구비를 따고자 하는, 그러니까 좀 더, 좀 더... 이렇게 스스로를 압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목표들을 이룬다는 것이, 대개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그때 난 긴 정체기를 보내고 있는 줄 알았다. 한창 조바심 나던 시간을 지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일을 했던 실험실 친구들은 각자의 성과물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원하던 직장으로 옮겨 갔다. 이럴 때마다 슬픔과 좌절감, 때로는 외로움과 두려움 같은, 여러 조합의 불안한 감정들이 반복되었다. 이런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뉴욕에서의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그거 하나였다. 결국은 어떠한 불안한 마음이든, 이런 것들은 떨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란, 제시간에 출퇴근하고, 촘촘하게 일하고, 점심시간 동안 센트럴파크를 걷고, 새로운 사람들과 반갑게 지내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 주변의 이스트강을 따라 산책을 하고, 뉴욕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부지런히 다니는 것이었다.
뉴욕의 박물관, 미술관들은 특정 요일의 특정시간대에 무료이거나 원하는 만큼 내고 입장이 가능한 곳이 많다. 물론 그 입장시간까지 줄을 길게 서야만 한다. Met, Guggenheim, Cooper-Hewitt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좀 더 걸으면 Met Breuer가 있고, M4 버스를 타면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일종의 수도원 미술관인 Met Cloister가 있다. 센트럴파크를 가로지르면 자연사박물관이 있는데, Met과 자연사박물관은 요일에 상관없이 뉴욕 거주자는 원하는 만큼 내고 입장할 수 있다. 가끔은 1달러 지폐 한 장, 어쩔 땐 쿼터, 그러니까 25센트 동전 하나 내기도 했다. 권장하는 요금에 비하면 어처구니없는 요금인데, 엘리사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 그랬다. 우린 이미 이 나라에 엄청난 세금을 내고 있고, 어차피 이곳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콧대 높은 고액 기부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라며, 늘 쿼터 하나를 내고는 의기양양하게 들어갔더랬다. 그녀의 말이 마음속에서 크게 들릴 땐 동전 하나, 이건 좀 아니다 싶으면 지폐 하나 이렇게 냈던 것 같다. 별로 차이는 없는 것이겠지만. 하여간 나의 금요일은 Whitney, Guggenheim, 아니면 Cooper-Hewitt이었던 것 같다. MOMA 역시 금요일 오후 시간이 무료였는데, 매주 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결국은 연회비를 내고 토요일 아침마다 MOMA로 갔다. 충분히 보고 나와서는 맞은편 53가 뉴욕 공립도서관에 들렀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관람석처럼 디자인한 곳이 있는데, 거기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며 간단히 샌드위치나 부리또를 먹기도 했다. 이러면서, 난 뉴욕에 있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더 누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일하던 곳이 합병으로 몸집을 키워가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내게 가장 유용한 복지혜택 중 하나였던, 오페라, 발레, 뮤지컬, 야구, 테니스 등의 입장권의 할인권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함께 하던 친구들도 뉴욕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게 편해지고 일상이 되어갔다. 자주 가다 보니, 미술관 전체의 모든 작품들을 한 번에 다 보지 않아도 되었고, 오늘은 입구 계단의 2층 왼쪽 갤러리만 보자, 또 다른 날은 기프트 샾과 1층만 보자, 그렇게 하나씩 시간을 들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날은, 할아버지와 손자 둘이서 그림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이 그림, 저 그림 앞에 머물러 있는 게 하도 흐뭇하길래, 은근슬쩍 한참을 따라다니며 그 감상을 훔치기도 하였다.
가끔씩 나는 인생의 어디쯤 있는가, 목표와 방향은 맞게 가고 있는가, 뭐 그런 질문들을 해보곤 한다. 뉴욕에서도 그랬다. 내 인생이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소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어쩌면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의 습관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계속 더 높은 목표를 세우게 만들고 날 더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 친구들은, 뉴욕에 있던 시간 동안 할 만큼 하고, 그리고 떠났다. 휴가 가기 위해 일한다던 프랑스 친구들이 있었는데, 처음 이 말을 들을 때는, 일을 더 잘하려고 휴가 가는 거라며 그 친구들에게 속으로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그 친구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휴가를 가야 하니, 논문 출판도 연구비 수주도, 목표를 높게 잡지 않았고 스케줄도 넉넉히 잡았다.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것이었다.
어느 해 9월 말, 뉴욕 양키즈와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를 보러 친구 가족들과 양키 스타디움에 갔다. 8회 말까지 0:3으로 뉴욕 양키즈가 지는 것을 보며 다들 피곤하다며 경기장을 나왔더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9회 말에 5:3으로 뉴욕 양키즈가 결국 이겼다 했다. 우린 그 생생하고 아슬아슬한 역전극의 흥분과 재미를 놓쳤고, 경기에서 질 거라는 결론을 너무 성급하게 내렸었다. 역시 야구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결론은 조급하게 내는 것이 아니다. 내 커리어도 늘 8회 말 같지는 않을 것이다.
TV를 보는데 Met Breuer 건물이 나온다. 여전히 이 건물이 Whitney로 불리고 있다면 2014년도 전이었겠네 그러고 있다. 그러다 세컨드 애비뉴를 따라 공사자재들이 길게 쌓여있는 걸 보면, 뉴욕 지하철 Q 라인이 96가까지 뻗어 올라오는 공사가 한창인 우리 집 앞, 내가 뉴욕에 사는 동안이었군, 뭐 그런 뉴욕의 시공간 맞추기 같은 것을 해본다. 이럴 때마다 이상한 쾌감 같은 게 생긴다. 이것이야말로 뉴욕에 잘 적응했었고 잘 살아냈다는 증거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난 뉴요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