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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19. 2023

탈 난 그녀의 아픔을 누가 알랴

                                               


 마당에 놀이꾼이 등장하며 판이 시작된다. 춤과 장단과 노래를 이어가며 흥을 돋운다. 그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고 손뼉 치며 신명을 푼다. 나 또한 놀이꾼과 하나 되어 질펀하게 논다.  

 온 산하가 녹색의 물결로 출렁대는 계절, 일기예보와 달리 안동 지역 하늘은 무척이나 맑다. 가는 곳마다 싱그러움이 넘쳐난다. 우리나라의 탈 중 유일하게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탈, 이를 소재로 별신굿을 펼치는 놀이마당에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일상의 어둠을 걷어내려는 듯 왁자지껄하다.

                                                       

 

오늘 벌이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각시탈을 쓴 광대가 무동을 태우고 북과 꽹과리를 치며 흥을 돋우는 무동마당으로 막을 연다. 이어서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 마당 등 6개의 마당을 펼치는데, 마당마다 삶의 애환이 녹아 있다. 쪽박을 허리에 찬 채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짚신을 삼는 할미마당에서 보듯 배불리 먹지 못해 애면글면하는 서민들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새 나오는가 하면 아랫것들을 골탕 먹이며 온갖 파행을 일삼는 양반네의 행실을 꼬집는 풍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처절하고도 애절한 사랑 노래로 가슴을 치게 한다.

 삶의 희비가 엇갈리는 마당놀이, 그중에 가장 관심 끄는 볼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남녀 간의 사랑이 흥건한 파계승마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 타령은 변함이 없나 보다. 배우나 못 배우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첫사랑에 대한 사연을 풀어놓으라고 하면 하루해가 모자랄 정도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바라보고 싶어도, 다가서지 못해 목 놓아 부르며 가슴앓이했던 사람.

 부네가 고운 자태로 요염한 미소를 드리우는 날이면 어떻게 알고 남정네들이 줄을 선다. 해 저무는지도 모르고 그 주변을 기웃거린다. 사뿐사뿐 춤을 추던 부네가 한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는데, 길 가던 중이 그 모습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낸다. 부네는 창피한지 흙으로 오줌 눈 자리를 메우며 얼굴을 감싼다. 그 모습조차 보기 좋은지 중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오줌을 혀로 핥는가 하면 오줌 묻은 흙을 양손으로 파 쥐면서 욕정을 드러낸다.

 부네의 얼굴엔 보이지 않는 아픔이 배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보아 넘긴다면 탈에 가린 그녀의 아픔을 알 길이 없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요, 울어도 우는 게 아니다. 웃음도 없고 울음도 없다. 아니, 웃음을 숨기고 울음마저 숨기고 있다. 괴롭거나 슬퍼도 속울음 울며 밖으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부작사부작 춤을 추는 부네의 얼굴에 지금 이 시각에도 어쩌면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것 같은 중년 부인의 얼굴이 겹친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 막걸리의 마지막 음절인 리 자를 따 '리 여사'라고 부르는데, 그녀가 부네처럼 변장하고 춤을 춘다. 부네가 작은 몸동작을 보이면 리 여사도 그 동작을 따라 한다. 손등을 살짝살짝 추어올리고 볼을 씰룩거리며 가냘픈 몸짓으로 유희한다.

 가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리 여사는 젊었을 적엔 패셔니스트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한복이면 한복, 재킷이면 재킷, 다 잘 어울린다. 옅은 청록의 나뭇잎과 나비 문양이 새겨진 하늘거리는 한복을 입는 날이면 숲에서 나와 뜰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요, 요정 같다. 그 정도로 한껏 멋을 부릴 줄 아는 리 여사지만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 있다. 어느 날엔 딸과 함께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강아지와 산책하지만 남자를 동행하고 외출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주부들이 먹을거리를 사거나 쇼핑하러 식자재 마트 같은 곳을 갈 때도 늘 혼자다. 그녀의 집에 고락을 같이 하는 이가 없음을 증명하기라고 하듯 편의점에 들러도 뭘 많이 사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음료라든지 커피가 손에 들려 있음 직한데 그마저도 없는 빈손이다. 특이한 것은 상의 부근이 불룩했다.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옷 안에 뭔가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 모습이 궁금했는데 며칠 뒤 그녀가 지나가는데 상의 블라우스 단추가 풀린 틈새로 흰색 플라스틱병이 눈에 들어왔다. 막걸리였다. 그런 모습으로 막걸리를 사 품 안에 넣고 다녔던 거다. 봉지에 넣어 와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을 텐데, 나름대로 계산이 선 듯했다. 술 먹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을 들락거리는 자신의 탈 난 모습이 창피스러워 숨기는가.

 그녀가 입은 상처는 무엇일까. 누가 그녀를 탈 나게 했을까. 편의점에 들르는 날 그녀의 얼굴은 침울하다. 화장해도 핏기 없는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디엔가 다녀올 때의 밝은 모습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요즘은 딸애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 그런지 집에서 편의점, 편의점에서 집, 그게 다인 양 다른 곳엔 발걸음 하지 않는 듯하다.

 부네가 고운 자태를 뽐내며 춤을 이어간다. 작디작은 몸짓으로 오금춤을 춘다. 중은 그 모습에 반해 집적댄다. 각시를 부처님 모시듯 위할 테니 함께 가자며 꼬드긴다. 부네도 어쩌지 못하나 보다. 그 계략에 반응을 보인다. 이때 초랭이가 나타나 그네들의 경망스러운 작태를 보고는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겠는지 탈 난 중을 나무란다. 그러자 파계승은 부네를 둘러업고 줄행랑친다. 이 장면을 끝으로 파계승마당도 막을 내린다.


 

 별빛마저 잠든 밤이면, 리 여사는 베란다 창에 몸을 기댄 채 슬픈 추억에 잠겨 있을까. 백석 시인은 소주를 마시며 생각하길, 세상이 더러워 산골로 들어가 살고자 했는데, 리 여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아픔을 누가 알랴. 탈 난 그녀를 누가 보듬어 주나.

 한 판의 마당놀이엔 인생의 사계(四季)가 들어 있다. 지지고 볶고 싸우다 곧 화해하고 웃음꽃 피우는. 인생 마당, 살다 보면 어디 좋은 날만 있으랴!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끝나자 관객들도 마당을 빠져나간다. 그런 시간임에도 나는 주어진 자리에 잠시 머문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다.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어느 지점에 닿아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인생 사계 중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계절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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