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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19. 2023

어머니의 반쪽


  

                                             

     

                                                      

   빈집. 어둠이 안주인 대신 나를 맞는다. 병실에서 사용할 용품을 챙기려고 현관문 손잡이를 쥐자, 얼음조각처럼 차디찬 감촉이 묻어난다. 집안 곳곳엔 설을 쇠고 먹다 남긴 음식 그릇이며, 개키지 않은 이불과 옷가지도 눈에 들어온다. 마치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건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채 8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 막 출근을 서두르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가냘픈 어머니의 음성. 목소리가 쉬어 있고 단어조차 어눌하고 불분명했다. 휴대전화에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저장해 두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을 정도다.

 “왜 그러세요, 엄니. 무슨 일이에요?”

 “니 애비 있던 병원이여~. 장호원에서 어제 목간을 한 것 같은데, 왜 내가 병원에 있어~.”

병원에서 하룻밤을 누워 있다 간신히 의식이 돌아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애타게 나를 찾는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초기 뇌경색 증세라 했다. 

 여동생들이 시집을 가고 나 또한 떨어져 생활하다 보니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지 못한다. 어머니는 혼자다. 일도 혼자 하고 밥도 혼자 드신다. 빈 뜰에 찾아든 달마저 가엾고 초라하다. 

 어머니는 논밭 일을 하거나 장날 약장사 구경하는 것 빼고는 꽃에 붙어사신다. 집안 곳곳이 화단이요, 온통 사방이 꽃이다. 채송화와 맨드라미와 분꽃은 어렸을 적부터 마당에서 보아왔다. 동생들이 손톱에 봉숭아로 물을 들이는 것을 보고 꽃을 알아갔고, 담에 피어나는 나팔꽃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도 꽃을 심었다. 

 샘가 살피꽃밭에 심은 장미. 뜨거운 햇볕과 혹한을 이겨내는 기개에 마음 끌린다. 창문을 타고 올라가며 꽃 잔치를 벌이는 매력에 마음 뺏긴다. 꽃이 연실 피어오르고 향기마저 그윽해 여러 집에서 탐을 내는 꽃. 가지가 늘어져 얼굴을 찔러대도 빨래집게로 집거나 홈통에 줄로 매달지언정 베어내지 못한다. 꽃이 지면 지는 게 아쉬워 조화(造花)를 달아 놓는 분이 어머니다. 

 장미는 어머니에게 애환이 서려있는 꽃이기도 하다. 6.25 난리가 나자 다른 사람들은 남으로 멀리멀리 피난 가는데 어머니네 식구들은 마을 인근 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걱정은 은신처까지 음식을 날라다 먹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그 일을 도맡아 했는데 아무리 인정사정없는 전쟁터라도 애들까지 해치겠느냐며 어른들이 결정한 일이라 했다. 어머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탄 터지는 소리들 들어야 했고 겁도 나고 무서워 오금이 저려도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 절망만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산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장미가 말을 걸어오고 풀꽃들이 손짓하며 어머니의 친구기 되어주었다. 장미는 어머니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또 다른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해 드린 유일한 꽃 선물 모란! 아침나절 햇살 받아 그 자태 고와도 지금은 같이 봐줄 사람 없다. 70이 드는 해에 떠나가신 아버지처럼 그 많은 날을 찬란히 불태우지 못하는 모란. 향기가 진하지 않고 꽃도 하루 이틀 반짝하다 시들고 마는 게 꼭 아버지와 닮았다. 공교롭게 아버지 생신이 들던 그 해 5월에 모란을 배경으로 가족들과 사진을 찍은 게 마지막이었다. 벌써 꽃이 된 아버지! 장미가 어머니의 꽃이라면 모란은 아버지의 꽃이다. 

 현관을 오르는 계단에도 갖가지 선인장이 줄지어 서 있다. 부채나 공작 모양을 한 것도 있지만 꼭 관상가치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선인장은 자식들과 달리 손이 많이 가지도 않거니와 내버려두다시피 해도 제 역할을 다하니, 어머니는 그런 모습이 좋은가 보다. 만 가지 시름으로 힘들어할 때마다 화사함으로 다가오고 위로받으니 속을 썩이는 자식 얼굴 보는 것보다 나아 그러는가 보다. 

 그렇게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니 사랑채를 헐어낼 때에도 화단을 빼놓지 않았다. 대개 화단은 마당이 줄어들까 봐 작게 하는데, 넉 자 정도나 되게 크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 마음과 달리 화단을 밭으로 쓴다. 두둑과 고랑에 고추와 상추며 배추를 심고 담에는 강낭콩 덩굴을 올린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늘을 놓을 거라고 한다. 화단에서 꽃을 가꾸든지, 씨앗을 파종하여 농작물을 수확하든지, 어머니의 허전함을 메울 수 있다면 꽃이다. 그것은 꽃이 된다.   

 어머니가 꽃을 부르나. 꽃이 어머니를 부르나. 집 울타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텃밭이며 논둑에도 개나리가 가득하다. 꽃을 가꾸고 돌보는 어머니의 정성에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정도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여름 장마에 논밭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할 요량으로 개나리를 심었다지만, 나는 안다. 개나리는 거칠고 고단한 하루를 어루만져주는 아버지의 손길인 것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마다 마음을 추슬러주는 바람막이 꽃인 것을. 울타리 개나리가 당신의 존재를 부각하고자 하는 경계의 꽃이라면, 논 개나리는 허전한 마음과 수줍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보호본능의 꽃이다. 

 마음으로 가꾸며 삭히며 익혀내는 자식도 꽃이다. 자식은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가꾸며 만들어 가는 꽃이다. 당신 몸으로 낳은 자식들이 몸에 난 가시로 찌르건, 잎사귀를 떨어뜨리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가슴으로 안고 간다. 나는 어떤 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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