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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스갯소리 May 27. 2024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변화무쌍한 일

건축학개론, 연가시, 용의자X, 감기...

여배우의 필모그래피가 아니라 나의 필모그래피다.

엔딩 크레딧에 이름은 안 뜨지만, 내가 영화들에 등장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때로는 배우 뒷통수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행인으로,

때로는 신종 질병에 감염된 병자로,

때로는 분노하여 화염병을 던지는 반동분자로,

때로는 동네를 단속하는 경찰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면 한 사람이 이렇게 변화무쌍해진다.


어째서 그런 결론에 이른건지 의아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기에 좋은 것으로 나는 연기 분야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을 행동으로 곧바로 실행시켰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카페에 가입해서, 지원조건과 일정이 맞으면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다. 지원이 받아들여지면 몇 일 후 실장이라는 사람에게 자세한 시각과 장소를 문자로 전달받는다. 복고풍 복장이나 운동복 등의 의상 컨셉이 있으면 그에 맞는 옷을 입고 당일에 집결지로 모인다. 그곳에는 영화 장면의 규모에 따라 적게는 10명 남짓부터 많게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다. 청년부터 시니어 연배의 어르신들도 계셨는데, 나도 나지만 다들 어떻게 알고서 이런 일을 하러 모였다는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장면에 따라 가족도 되었다가, 길 가는 군중도 되었다가, 양 편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도 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언제 OK 싸인이 떨어질지 모르니 마냥 대기하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게 일이었다. 단순한 일이다 보니 일한 시간 대비 일당은 낮은 편이었는데, 기억으로는 기본 25000원에서 시작했고 가장 많이 받아본게 새벽까지 촬영하고 야간수당을 더해 75000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날은 이제훈이라는 배우의 실물을 코앞에서 보고 너무 잘생겨 깜짝 놀란 날이었지만, 촬영이 끝나고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졸면서 첫차를 기다려야 했기에 배우의 잘생김 따위가 나의 안위를 하등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엑스트라 경험을 통해 얻은게 있나?'라고 자문하고 자답을 해본다면 '그렇다.'이다. 연기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만큼 중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는 무한 대기 속에서 시간의 소중함과 집의 따스함을 알게 되었고, 나의 20대 시절이 박제된 영화의 장면들을 얻었고, 이색 아르바이트를 해본 썰을 풀 수 있으니, 이정도면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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