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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직 Nov 23. 2018

아이에게 '매너'를 가르치기 위해 내가 변하기로 했다.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감을 바탕으로


C언론사 손녀의 갑질 논란이 일고 있다. 화가 많이 나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지만,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마음이 아팠다. 10살 아이를 둘러싼 비옥한 삶의 환경이 그 아이로 하여금 그것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배울 기회 말이다.


나의 아이에게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나의 삶을 반추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과연 내게 (직업적이지만) 편의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의 존재와 감정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또 그것을 충분히 표현하고 살아왔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아니었다. 많은 순간을 '당연하다'라고 생각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내게 편의를 제공할 때, 인사를 하지 않는다거나 무례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인사와 형식적인 목례 정도로 응대하며 지나가곤 했다. 내가 받은 편의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때, 내게는 몸에 밴 예절이 있었을 뿐, 진정한 감사와 개인, 개인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지 않았다. 나는 사람까지 서비스의 일부로 치환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이제와, 아이를 낳고 기르며 타인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한다. 나와 남편이 타인의 존재와 존엄을 인정할 때에만 준이에게 진짜 '매너'를 가르칠 수 있다고. 비단, 인사뿐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과 마음가짐을 다시 점검하자고. 예의범절, 에티켓보다 백만 배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몸으로 행하는 '매너'이다. (나의 기준에, 우아하게 나이 드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타인에게 무해하길 바라며, 타인도 나에게 절대적으로 무해하길 바란다. 서로 영향력 자체를 주고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준이가 살아갈 미래는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세상사가 톱니바퀴처럼 항상 맞아떨어져 가며 자기 일만 챙기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우리 아이가 살아갈 사회를 위해  낯선 타인에게 내 곁도 조금만 더 내주며 살자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의 낮은 곳에 손끝 하나만큼의 온기라도 더하자 마음먹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우리의 삶 저변에서 일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내가 먼저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아침부터 나의 아이가 오 다니는 길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환경 미화원 아저씨의 노고도, 마트 무빙워크 끝에서 카트를 살짝 끌어올려 주는 아르바이트생의 배려도, 바쁜 생활에서 은행까지 갈 수고를 덜어주는 콜센터 직원의 친절함도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준이와 함께 그분들께 응당 감사함을 많이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우연히 맞닥뜨린 장수연 pd의 책 한 구절과 인터뷰 기사가 나를 멈칫하게 했다.


아이에게 화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힘으로 누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절대적으로 강자인 내가 철저히 약자인 누군가에게 가슴 깊이 우러나는 존중감으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말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조금 더 나은 사람, 조금 더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저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혹은 누구에게나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존중감으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내가 준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삶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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