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이 중요한 이유
지난 상담 시간에는 중학생 때 겪었던 일을 털어놨다. 집에 모르는 사람이 침범했고 큰일이 날 뻔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지만 그 사람에겐 흉기가 있었고 우리 집에 한 번 더 찾아왔었기에 정말이지 끔찍이도 두려웠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악몽과도 같은 일 때문에 꿈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일만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상담을 통해서 오롯이 그 사건으로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십 개의 감정이 그려진 감정카드를 내게 주었다. 사건을 떠올리며 느낀 감정이나, 그 사건이 있은 후 가까운 사람들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느낀 감정카드를 골라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 일을 가족들이 알게 되었을 때 아빠가 바로 달려와주셨는데 그때 감사함을 느꼈다. 그때 느낀 감정인 '감사함'카드를 꺼내 들면 된다.
수십 개의 감정이 쓰여있는 카드를 보면서 스트레스받을 정도의 나쁜 날씨, 구름 낀 우울한 날씨, 햇살 아래 기분 좋은 날씨, 편안한 날씨 이렇게 네 가지 칸에 해당되는 감정 카드를 올렸다. 나는 올려놓은 각각의 감정 카드를 보면서 선생님께 하나씩 설명해야 했다. 먼저 좋은 감정을 설명하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했지만 좋았던 감정은 가장 나중에 하면 좋겠다고 했다.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감정에는 '놀람', '무서운', '불안한', '겁나는' 감정을 올려놨다. 그 모든 감정들은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 혼자 있는 집에 모르는 남자가 들어와 나를 제압하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을 때와 그날 이후 다시 우리 집에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 혼자 집 갈 때. 나는 너무 무서웠고 놀랐고 불안했고 겁이 났다. 그런 상황에서는 문제의 공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이사'가 당연히 필요했던 시기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하교 후 집에 들르거나 학원이 끝나면 밤늦게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게 무서웠던 게 당연했다. 다시 찾아올까 봐, 내 집을 알고 또 와서 나를 해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는 게 내겐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구름 낀 날씨에는 '무관심한', '실망스러운' 등의 감정 카드를 올렸는데 이것들은 가족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엄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지 않으셨다. 괜찮으냐는 말을 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표현을 안 하는 성격이시라, 일이 바쁘니까 그러시겠지라고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믿고 그렇게 엄마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내가 만약 아이가 있고 무서운 일을 겪었다면 꼬옥 안아주고 걱정 말라고, 엄마가 지켜주겠다고 안심하라고,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토닥여줬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내가 겪은 일이 그렇게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무관심한 가족들의 태도를 보고 외로운 감정이 많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마지막으로 '안심되는', '다정한', '감사한'카드를 편안한 밤 날씨 위에 올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아빠에게 바로 전화했을 때 바로 달려와줬던 일, 놀랬을까 봐 청심환을 사주셨던 일, 내 말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친구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카드를 집었다고 설명했다.
한 가지 사건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가족들에게 조금 더 보살핌을 받고 안심받기를 더 원했던 것 같다. 충분히 내게 관심을 가져주고 안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더 그 일이 더 트라우마로 남았던 게 아닐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무섭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던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내가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감정들을 느낀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아마 그 트라우마는 평생 조금씩 내 기억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진 않는다는 점이다. 가위에도 눌리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이 상담을 마지막으로 나는 상담을 종결했다. 더 이상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이전까지의 상담 점검을 하면서 앞으로 더 이어나갈지 종결할지에 대해 내게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 정도 말해주었다. 하나는 내 주변에 의지할만한 안정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글쓰기 등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등 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담을 통해서 주변에 어떤 사람을 내가 사귀어 친구로 두는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돈독하다면 마음이 힘들어져도 금세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많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안전 기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꾸준히 내 감정을 기록하고, 부정적인 감정표출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넘어지고 실수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결국엔 씩씩하게 일어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