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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넣어 둔 말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어둑해진 저녁, 냉장고 문을 연다.


하얀 햇살처럼 여명이 밝아오면 나의 생각에도 불이 켜진다. 미리 그려둔 메뉴가 있을 때도 있고,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메뉴를 조합할 때도 있다.


냉장실, 냉동실을 후루룩 훑어보고 가장 오래된 재료부터 찬찬히 꺼낸다. 가시 붙은 오이, 흙 묻은 당근, 뿌리가 살아 있는 대파와 두부를 꺼낸다. 미처 손질 못 한 채소들은 싱크대에 넣어 놓고 슬슬 닦아내기 시작한다.


둥글둥글한 조선애호박은 흐르는 물에 씻어서 뭉텅뭉텅 무심하게 썬다. 쿰쿰하고 짜디 짠 집된장은 한 큰 술, 부들부들한 두부는 담뿍담뿍 썰어서 한편에 준비해 둔다. 빤들빤들 껍질 벗은 양파는 눈물이 찔끔 나고, 얄팍하게 나박 썰기한 무를 가장 먼저 넣어야 된장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시원하다.


이제는 냉동실 문을 열어 뭐가 있는지 본다. 하얀 입김이 싸하고 흘러나온다. 중간층 왼쪽 구석, 연두색 반찬통엔 토종콩들이 잠들어 있다. 콩깍지에서 나오자마자 냉동실로 직행한 넝쿨동부콩을 꺼내서 하얀 쌀 위에 올려 밥을 짓는다.


서리태도 한 줌 꺼내 물을 부어 냉장실에 넣어 놓는다. 이건 다음밥을 짓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마침 냉장고 속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청양고추를 꺼내고, 향이 다해가는 표고버섯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마르기 전에 얼른 집어든다.


재료를 꺼내다 보면 그 속에 딸려오는 말들이 많다. 맵다, 쓰다, 달다, 시다. 시큼 달달하다, 향긋하다, 아릿하다, 쿰쿰하다, 고소하다, 비릿하다, 단짠단짠. 여러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잡념은 사라진다. 숭덩숭덩, 어슷어슷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고, 된장국물을 휘휘 저어 간을 본다.


함께 먹을 깻잎김치도 꺼내고, 조물조물 무쳐서 양념을 함빡 머금은 가지나물도 꺼낸다. 오늘 성공한 참외오이무침은 오독오독한 식감과 은은한 단맛이 예술이다. 그 옆엔 내일 먹을 단호박감자전이 있고, 냉장고 앞칸에는 어제부터 우려낸 시원한 녹차가 있다.


냉장고에 넣어 둔 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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