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맥 속으로 스며드는 잡념
동네 마트에서 깻잎을 한봉지 사가지고 왔다.
커다란 투명 비닐백에 약간 시들해진 이파리가 그득 들어 있다. 할인이라고 해서 집어 온 채소 중에 온전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것도 시원한 물을 만나면 다시 반짝 기운을 차린다.
흐르는 물에 씻을 땐 비를 함박 맞은 것처럼 향기가 더욱 진해진다. 아이 손바닥만한 작은 깻잎과 내 손바닥보다도 큰 깻잎. 넉넉하게 담은 깻잎은 크기도 제각각이다. 흐르는 물에 살살 씻은 다음 물기를 탁탁 털어 내면 마치 잎사귀들과 일일이 인사한 것처럼 애정이 생긴다.
푸른 잎과의 악수. 이제 너는 나를 만나서 깻잎김치로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주방에 가득 퍼진 진한 깻잎 향기로 작은 손바닥들의 대답을 갈음한다. 이건 뭐 소리 없는 아우성인가? 잡아 먹히기 싫다는 의민가?
깻잎김치는 잡념을 내려놓기 좋은 레시피다.
양념장도 복잡하지 않다. 양파, 당근을 채썰어 넣고 청양고추가 있다면 조금 다져 넣고. 여기에 저염간장, 발사믹식초를 7대 3의 비율로 넣는다. 짜지 않으면서 새콤한 맛으로 짠맛을 보완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사실 사람의 미각은 그렇게 예민하지 않다. 짠맛, 신맛을 구별하는 건 정말 몇 안 되고 그마저도 섞어 놓으면 잘 구별해내지 못 한다. 그래서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신맛을 짜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둘의 구별은 있다. 짠맛은 농도가 짙어질수록 쓴맛이 뒤따라 오지만 신맛은 그렇지 않다. 신맛은 시큼한 맛에 침이 가득 고일 뿐 쓴맛은 없다. 이런 신맛은 비어있는 심심한 맛을 잘 받혀준다.
일종의 미각을 속이는 상승효과라고 할까? 실제로 미각을 연구하는 이론 중에는 신맛이 짠맛의 감각을 끌어 올린다는 이론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이용하면 짜지 않고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양념장 속에는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양념을 버무렸지만 깻잎들이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설탕은 넣지 않는다. 얇게 썰은 양파, 당근, 고춧가루에서 껄죽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느껴진다. 그러면 간장을 많이 넣을 필요도 없다.
고춧가루 2큰술을 넣고 참기름 대신 통깨를 넣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고소함으로 깻잎의 깔끔한 맛을 살려 낸다. 농도가 진한 양념은 물을 적절히 넣으면 오히려 다채로운 맛들이 나눠지면서 혀 끝에 잘 느껴진다. 진득한 양념장에 깻잎과 동량으로 물을 넣어 농도를 맞춘다.
깻잎향을 가리지 않은 적절한 양념 속에서 초록의 체취가 살아난다. 깻잎들과의 악수. 짙은 향기를 가진 자연의 풀내음은 남겨두기로 했다.
양념장이 다 만들어졌으면 한 장 한 장 쓱쓱 양념장을 발라준다. 찻숟가락으로 한 수저씩 떠서 적당히 골고루 발라준다. 짜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양념이 빈 곳 없이 골고루 잘 발라져야 한다.
깻잎김치는 손이 많이 간다. 그래서 잡념이 사라져버린다. 나는 양념을 바르면서 걱정과 근심, 후회, 불안을 내려놓는다.
만드는 과정이 고되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깻잎김치 100장 만들기는 바로 김장이 된다. 푸른잎에 작은 숟가락으로 양념을 정성껏 발라준다. ‘너희들은 이제 맛있는 김치가 될거야.’
찻 숟가락으로 쓰는 친필 싸인이다. 생깻잎을 이용하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한번씩 가운데를 꾹꾹 눌러준다. 그러면 양념이 잎맥 속으로 잘 스며든다. 손가락 도장까지 찍는 건가? 너희들을 맛있는 김치로 탄생시킬거란 약속을 꾹꾹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