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슈는 쩨쬬를 좋아해> 13화
2022. 9. 29. 목
섬세함에 감동을 받는다. 똑같은 커트라도 세심하게 한다. 머릴 만져주는 걸 좋아하니 샴푸 받는 것도 중요한데 슥슥~ 하고 끝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이곳처럼 꼼꼼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샴푸대에 기대어 앉아 뒤로 누우면 넓은 판이 뒤통수에 닿아 기댈 수 있다. 마치 빨래판에 머릴 대고 눕는 기분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가서 어머니에게 안겨서 머릴 감던 게 떠올랐다. 목욕탕의 뜨겁고 습한 공기 그때의 기억은 나에겐 고문이었다. 그곳에서 뜨거운 물이 머리에 닿고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 누워 고꾸라져 있는 순간은 최악이었다. 이런 최악의 기억을 오늘의 샴푸가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어린 날 동네 목욕탕에서의 고문은 추억이 되었다.
2022. 10. 8. 토 ~ 11. 화
쩨쬬가 어머니께서 이번 주말엔 어디 안가냔 말에 후다닥 제주행 티켓을 끊어 제주로 왔다. 한글날이라 막바지 여행길에 올랐는지 표가 매진이었고 쩨쬬는 새로고침해서 취소표를 구했다. 심지어 돌아가는 건 끊지도 않았다. 이게 쩨쬬다. 공항에서 만나 몸국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신설오름에 가서 몸국과 돔베고기를 시켰고 앉은자리가 낯설었는데 원형 테이블이 일반 테이블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카페애옥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혼인지에서 산책을 하고 뛰꾸부니오름이 특이해서 가보았는데 입구를 찾지 못하고 길바닥에 뱀을 만나 둘이서 호들갑 한 번 떨어주고 함덕 서우봉으로 갔다. 간단하게 한 바퀴 돌려고 했는데 길머리를 어디로 향했는지 해안으로 내려가다 진지동굴에 당도했고 이내 한참을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니 드디어 사람이 보였다.
"와! 사람이다!!!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나온 입구엔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었다.
2022. 10. 9. 월
브런치로 다시 한번 카페애옥 오늘은 프렌치토스트를 시켰다. 요리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나오시더니 어제 왔었는데 또 왔네 하시길래 나는 능글맞게
"그쵸? 저희 어제 왔었죠???"
정원을 둘러보고 또 다른 사장님께서 주택에 사냐며 꽃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지금은 오피스텔이라 주택 장만하면 꽃을 받기로 약속을 하고 레드키위를 선물로 받았다. 섭지코지를 걸으며 소화를 시키고 예상치 못한 비가 한바탕 쏟아져 쫄딱 젖은 채로 단백이라는 고깃집에 갔다. 쩨쬬는 고기보다 탱글탱글한 모찌두부가 취향에 맞는지 갈색 나무젓가락으로 두부를 탱탱 치며 신났다.
2022. 10. 20. 목 또똣
연애를 일 년 동안 하니 익숙해져서인지 예금금리가 올라서인지 다가 올 미래를 구상하는데 단순하고 단호한 결정을 하고 싶기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나?
매력, 색다른 매력, 예쁜 게 매력일 수도 있고 성격 좋은 게 매력일 수도 있다. 내가 느끼는 좋은 매력도 차츰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다른 매력에 호기심이 생긴다. 익숙해지는 게 자연의 섭리겠거니 한다. 나의 이성으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나는 상대방에게 확신이 들지라도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낌만으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대화를 하고 대답을 들어야 한다. 남녀관계는 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결혼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그렇다면 나는 플랜 B를 준비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쩨쬬가 나를 확 잡아주면 난 잡힐 텐데 내 생각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으니 당최 알 수가 없다.
2022. 10. 22. 토 ~ 23. 일 바람
농산물 행사부스에서 취나물을 받아 들고 새별오름을 한 바퀴 돌아 범섬이 보이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표선으로 왔다. 내일 10km 마라톤이 있어 금욕인지라 쩨쬬는 끙끙 앓았다. 건들면 신호를 주는 것으로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뽀뽀가 새삼 달콤했다. 저녁으로 쌀국수와 분짜를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여러 차례 새벽까지 고비가 있었으나 잘 견뎌냈다. 쩨쬬는 시름시름 앓았다. 아침에 일어나 떡 두 개를 먹고 김녕 구좌체육관으로 향했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의 대회인가? 혼자 다니다가 응원해 주는 이와 함께 가니 보호자가 있는 것 같고 든든했다. 트랙을 돌며 몸을 풀다가 쩨쬬를 놓쳐서 쩨쬬를 찾는다고 몸을 과도하게 풀었다. 내 휴대폰도 쩨쬬가 들고 있어서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해 다시 만났다. 몸은 충분히 풀었고 10km 출발! 오늘 잘 뛰어야 38분 후반이라고 생각되어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으려 자제했다. 선두 세명과 점점 멀어져 가고 공군 SART와 나란히 달렸다. 생각보다 더웠고 갈증이 났고 지금은 등 뒤에서 바람이 불지만 돌아갈 때 마파람이 될 것이기에 계속해서 여유를 두려고 했다. 역시나 반환점을 도니 바람이 세다. 4분 10초/km까지 페이스가 떨어졌지만 이 악물고 달린 결과 5등으로 순위권으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시상대에도 올라가 보고 5만 원 농협상품권을 받았다. 나도 좋고 쩨쬬는 더 좋아했다. 내가 달리는 동안 쩨쬬는 이벤트 부스에서 제공하는 라면도 참고 견뎌 김녕 해녀촌 회국수를 먹으러 갔다. 나의 마라톤 때문에 금욕을 했던 우리는 회국수를 신나게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