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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인생의 흔한 아이러니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


Anna. 고갈티에서 벌써 9년째 일을 하고 있는, 폴란드에서 온, 큰 키에 비쩍 마른, 창백할 만큼 하얀 얼굴을 가진, 나보다 훨씬 더 엄격한 채식주의자인, 한때는 고갈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텐더였던, 안나.      


그녀는 매니저가 되어 달라는 사장 마틴의 제의를 거절하고 그냥 바텐더로 남아 있지만, 실은 매니저나 거의 다를 바 없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다른 매니저들이 모두 6시 이후에나 출근하는 날들이 대부분이라 오픈 시간부터 오후 6시까지는 안나가 이곳의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오후 6시만 땡- 하면 신데렐라처럼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고갈티에서 낮 시간대의 스케줄을 받기 전까지 나는 안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작고, 아담하고, 다정한 더블린의 거리. 매일매일 이 거리를 걸어 고갈티로 가곤 했다.



                    

이곳에 들어온 후 처음 두 달 동안은 매일같이 저녁 스케줄만을 받아야 했다. 고갈티는 크게 2교대로 일을 하는데,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를 ‘Day time’,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까지를 ‘Night time’이라 불렀다. 물론 주말이 되면 교대랄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만, 주중이라면 낮 시간대에는 식사 손님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비교적 조용하고 정돈된 상황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식사를 한 손님들이 팁을 주는 데에도 훨씬 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낮 시간대 스케줄을 받길 원했다.  


하지만 식사 주문을 정확하게 받고 애피타이저와 메인 메뉴, 디저트를 차례대로 서빙하는 일이 술만 마시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보통 일을 잘하는 스태프들이 낮 시간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니까 처음 두 달간, 저녁 시간대에만 일을 해야 했던 것은 그만큼 내가 일을 잘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해가 질 무렵에나 출근을 해 새벽 네 시까지 일을 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직원들의 스케줄을 총괄하고 있던 비키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단, 너 내일 오픈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퇴근해.”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나는 잠깐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픈이라니? 어디를? 어떻게?


하지만 늘 재빠르게 움직이는 비키는 이미 내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퇴근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마침 메인바에서 일하고 있던 미승이 붙잡았다. 


"언니, 내일 메인바 오픈해야 한다며?" 


말은 거침없지만, 마음은 늘 상냥한 그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승은 그 바쁜 곳에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내일 아침 출근을 하면 내가 해야 할 일들 몇 가지를 빠르게 일러 주었다. 그리고 그 말들을 꼭꼭 귀에 눌러 담은 채, 다음날 아침 고갈티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 바로 안나가 서 있었다.         





안나는 나로 하여금,   


‘이런 식이라면 고갈티에서도 일할 만하겠다.’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만큼 나는 안나와 일하는 걸 좋아했다. 그동안 다른 바텐더들과 일했던 것을 떠올리면, 안나와 일하는 것은 축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9년이나 고갈티에 몸담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고갈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때문에 손님이 나에게 조금만 어려운 주문을 할라치면, 내가 부탁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먼저 그 주문을 알아듣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안나는 바 뒤에 서서도 플로어(floor)*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눈에 다 꿰뚫어 보았고, 덕분에 나는 주문을 잘못 받아서 실수를 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단, 주문을 받을 때는 항상 사이드 메뉴 옵션까지 확인해. 저 손님이 원하는 게 칩스(감자튀김)야, 포테이토(구운 감자)야?”     

“단, 저 테이블에서 아까 다이어트 코크랑 보드카를 같이 달라고 하지 않았어? 난 그렇게 들었는데?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지금 너 바빠서 방금 주문받은 디저트 만들러 못 가잖아. 기다려봐. 내가 레스토랑에 주문할게.”     


예전에는 여분의 빵을 더 달라든지, Seafood chowder에 들어가는 재료를 확인한다든지 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없이 꼭대기 층에 있는 키친까지 뛰어 올라가야만 했다. 하지만 안나와 일을 하는 동안에는 대부분의 답을 그녀가 주었고, 바쁠 때는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구역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나는 안나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많은 걸 배웠다. 어떤 매니저도 알려주지 않았던 세세한 것들을 나에게 가르쳐준 이는 다름 아닌 안나였다. 덕분에 나는 고갈티에서 좀 더 잘 일할 수 있게 되었고, 한때는 그렇게 일을 배워 나가는 과정을 조금은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고갈티의 비하인더 바.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저곳에 안나가 서 있는 걸 가장 좋아했었다. 




사실 Good morning이라는 내 인사에, 웃으며 답하는 법도 없던 안나가 그렇게 나를 친절하게 대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색만큼이나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말투도 행동도 언제나 조용하기만 해서 쉬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런 안나가, 그 무심한 얼굴을 하고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도와주었을 때 나는 매번 그 도움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이없는 실수를 한 후에 나도 모르게 혀를 낼름- 내미는 나를 보고 안나가 장난스럽게 내 모자를 툭 쳤을 때, 뜬금없게도 왠지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즐겁기까지 했다.      

 

그녀와 일할 수 있다면 고갈티에서 일하는 것도 더는 지옥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들. 안나를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꽤 좋아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분명히 나에게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 하여금 결국 고갈티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안나라는 건 인생의 흔한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Bar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긴 카운터 뒤쪽을 behind the bar라고 하고, 보통 바텐더들이 behind the bar에서 일하기 때문에 그들을 bar staff라고 부른다. 반대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는 카운터 바깥쪽에 있는 floor에서 일하기 때문에 floor staff라고 한다. 고갈티에서는 floor staff가 손님에게서 주문을 받아 bar staff에게 주문을 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floor staff와 bar staff 간의 호흡이 매우 중요했다. 내가 안나와 일하는 걸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녀가 누구보다도 숙련된 바텐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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