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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나를 잘 부탁해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3)

 



처음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유난히도 낮게 드리워진 하늘이었다. 낮은 건물들 위로 잔잔하게 펼쳐진 더블린의 하늘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도시가 서울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데 마음이 놓였다. 서울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 도시에서 사는 일은 종종 나를 지치게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터벅터벅 직장으로 걸어가며 ‘과연 내가 이곳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날이 많았다.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더블린의 낮은 하늘. 이 도시에서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을 품어 보았지만, 그래도 그 감정의 총합은 결국 '그리움'이다.




물론, 한때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가족이나 돈이나 직업 같은 것. 뭐,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도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믿음이 무너진 건,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던 어느 새벽의 일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지만, 아직 난방을 틀진 않은 채였다. 춥지는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이불을 끌고 와 온몸에 둘둘 두른 채 앉아 있다가, 문득 혼자서 중얼거렸다.


"너는 패배자야."


열심히 해본 일이 있었고, 좋아하던 얼굴이 있었고, 그 일과 그 사람이 함께 있는 내 미래를 그려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꿈은 그냥 꿈으로 남았고,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도 그냥 사랑으로만 남았다. 그러니까 삶 하나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한 건 그 순간이었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를 패배자라고 부르며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왜 떠나는 건데?”     


나는 박스 안에 책을 챙겨 넣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더블린이 대체 어디야?”

“아일랜드의 수도.”

“거기를 왜 가?”

“그냥. 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거기에 왜 가고 싶어 졌냐고?”     


하지만 나는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꿈으로만 남은 꿈이라든지, 그냥 사랑으로 끝난 사랑이라든지, 뭐 그런 걸 설명해야 했을까. 아니라면 삶의 한 챕터가 끝났다든가, 그러니 이제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한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실은 그런 것들이 내가 더블린으로 떠나는 진짜 이유인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글쎄, 왜 갑자기 더블린에 오고 싶었던 거냐고?     


나는 더블린의 낮은 하늘을 보면서 그에 대한 답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그 답을 찾을 겨를도 없이, 택시 앞좌석에 앉아 있던 유학원 디렉터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깨웠다.     


“거의 다 왔네요. 곧 내릴 거예요.”    

 

그 말에 창밖을 내다보자, 더블린의 시내 한가운데 도착했음을 알리는 찰스 파넬(Charles Parnell)의 동상과, 하늘을 찌를 듯 멋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스파이어*가 보였다.     




'대니얼 오코넬(Danniel O'Connell)'의 동상. 이 동상에서부터 더블린의 중심 거리인 오코넬 스트리트가 시작된다.  




       

더블린을 선택한 건 이곳이 영어권 국가의 수도이고, 유럽의 도시이며, 영국의 도시들보다는 물가가 쌀 거라고 생각했고, 학생 비자를 가지고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일랜드라는 나라나 더블린이라는 도시 자체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서 이곳에 도착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더블린의 첫인상은 꽤 마음에 들었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엔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붐비지도 않아서.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그리 위압적이지도 않아서. 낮은 건물 위의 낮은 하늘이, 유난히도 파랗고 말개 보여서.   

   

나는, 조금 웃었다.   

   

‘앞으로 나를 잘 부탁해.’    

 

나를 아주 잘 봐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냥, 조금만 친절을 베풀어 주었으면 했다. 이렇게 불쑥, 이 도시로 피난 오듯 날아온 나에게 더블린이 너무 차갑게 굴지는 않기를. 이런 나를, 조금만 어여삐 여겨주기를.   

   

그런 막연한 소망을 품고, 더블린에서 내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 스파이어(Spire of Dublin): 더블린의 명물이라면 명물이라 할 수 있는 긴 첨탑이다. 2003년, 아일랜드의 고속 성장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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