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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우 Aug 24. 2024

그냥 쉬세요

푹~ 쉬세요

정섭 씨는 방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담배를 뻐끔 피웠다.     


“씨바. 존나게 내리네.”     


 5월. 


봄이라고는 하지만 날씨는 이미 여름 못지않게 더웠고, 가끔 내리는 비도 열대지역의 스콜처럼 세차게 퍼부었다. 



뉴스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올해는 역대급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퍼붓는 걸 보면 아마 뉴스의 그 말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정섭 씨는 담배를 한 개비 다 피우고 끄자마자 다시 또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댕겼다. 


요즘엔 모든 건물에서 금연이라고 하지만, 정섭 씨가 머물고 있는 오래된 여관인 이곳에서는 모두가 방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웠다. 


옆방에서도, 아랫방에서도 모두가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어 여관건물 전체에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 공사 현장은 쉬었고, 이곳 여관에 머물고 있는 대부분 장기투숙객들을 비롯한 정섭 씨의 오늘 수입은 0원이었다.     


 창밖 아래 골목길엔 외국인 노동자 셋이서 각자 컵라면에 물을 받아선, 검은 봉지를 들고 시시덕거리며 여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섭 씨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씨발. 내가 저 외국인 노동자 새끼들보다도 못하네...”     


 며칠 동안 일을 하지 못한 정섭 씨의 지갑은 텅텅 비어 있었다. 비가 자주 내려서 일이 없기도 했고, 가끔 일이 생기더라도 일을 하기가 귀찮거나,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도저히 일하러 갈 수가 없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도 생활비가 똑 떨어지기 전에는 며칠이라도 일을 해서 수중에 얼마의 돈이라도 챙겨놓고는 했는데, 이렇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릴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릴 거라고 예상 못하는 경우는 매년 장마철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속이 쓰렸다. 어제도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소주 4병을 깠기 때문에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 절실했다.   

  

 정섭 씨는 담배를 비벼 끄고 스마트폰을 잡았다. 이럴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송팀장.”     


“왜요?”     


송팀장의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요즘 현장 많이 바쁘지?”     


“참나. 그게 뭔 말씀이세요?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다들 일이 없어서 죽을 맛이지.”     


정섭 씨는 순간 자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에 머쓱해졌다.  

   

“그러니까.... 그래. 내가 일을 도와주러 나가고 싶어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까 갈 수가 없네. 갈 수가 없어.”     

“아, 됐어요. 왜요? 또 돈 필요해요?”     


 송팀장은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정섭 씨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뻔히 알면서도 꼬박꼬박 정섭 씨의 전화를 피하지 않고 받아주는 송팀장이 정섭 씨는 고마웠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비가 오랫동안 올 줄 몰랐지. 아니면 이렇게 돈이 뚝 떨어질 일도 없었을 건데. 송팀장... 나 이십만 원만 가불해 줘. 비 그치면 일 나갈게.” 

    

“아, 됐어요. 내가 지금 돈이 어디 있어요? 비가 와서 일도 못하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아니, 송팀장. 나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뭐 하나 먹을 것도 없어. 먹어야 일을 하지. 차비도 없고. 차비는 있어야 일을 나갈 수 있을 거 아니야?”     


“...”     


 송팀장은 말이 없었다. 


정섭 씨는 송팀장이 고민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에도 이렇게 고민하다가 그럼 십만 원이라도 보내드릴게요. 나 진짜 돈 없어요. 이렇게 말을 했었다. 


딱 절반으로 잘라서. 십만 원을 부탁하면 오만 원을. 이십만 원을 부탁하면 십만 원을. 


'송팀장아! 내가 너 머리 위에 있어 인마. 어차피 네놈이 절반만 보내줄 거라 생각해서 이십만 원이라고 말했다. 알겠냐? 큭큭.' 

    

송팀장은 스스로 흡족해하며 미소 지었다.     


“형.”     


“어, 그래. 송팀장.”     


“그냥 쉬세요.”     


'... 뭐.... 뭐엇?!'


정섭 씨는 예상치 못한 송팀장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그냥 쉬시라고요. 앞으론 안 나오셔도 됩니다.”     


“뭐? 아니, 왜?!!”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애들이 형하고 같이 일하기 싫어한다고.”     


“......”     


정섭 씨는 분노에 가득 차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진짜 오지 마라고? 송팀장이 나한테?!'


순간 화가 확 뻗쳐올랐다.     


“야!! 송팀장 이 새끼야!! 애새끼들이 아무리 칭얼거려도 그렇지!! 니가 누구한테 RCS 배웠는데!!”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여태껏 배운 정이 있어서 참았지, 아니면 벌써 형하고 관계 정리했어요! 그리고, 가르쳐 줬다고요? 그게 제대로 가르쳐 준 겁니까? 타워크레인에 발판을 통째로 걸어놓고 30층 높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언제 추락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낄낄거리고 좋다고 웃고 장난이나치고! 사람 놀리기나 하고!”


     

“그래 새끼야. 그때를 생각해 보라고! 니가 내 바짓가랑이 붙들고 벌벌 떨었던 거 생각 안 나냐?! 그랬던 새끼가 이제 팀장이라고 보이는 게 없냐?! 어?!”     


“그러니까 그게 사람 놀려먹기나 하는 거지 가르쳐 준거냐고요!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 같지도 않게 같이 일한 날이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술 마시고 출근 못 한다고 일을 째버리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타워크레인에 혼자 둥둥 매달려가지고, 내가 진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줄 압니까? 형 좋아하는 그 술 때문에!!”    

 

“...”     


 정섭 씨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송팀장의 말처럼 송팀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정섭 씨는 아직 일을 잘 모르는 송팀장이 위험할 수도 있고, 현장이라는 특성상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뭐 대숩니까? 애들하고 일할 때, 무거운 거 들기 힘들면 가벼운 거라도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하면 애들이 나이 든 사람이 무거운 거 안 든다고 뭐라고 합니까? 다 이해한다고요. 열심히 하려는데 체력이 달려서 못하는 건지, 그냥 시간만 때우려는지. 그걸 일하는 애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비가 조금만 내리면 연장 정리하라고, 오늘 일 못한다고 사람들 선동해서 분위기 어수선하게 만들고. 저도 형하고 더 이상은 일 못합니다! 돈 필요하면 딴 데 알아보세요!”     


송팀장은 화를 내고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송팀장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정섭 씨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하아...... 와...... 이 씨......”     


 정섭 씨는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댕겼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경우는. 


지난번 송팀장과 다투긴 했지만, 그전에도 다툼은 가끔 있었었기에 이렇게 자신을 내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투고 나서도 전화를 걸어 앓는 소리를 하면, 싫은 소리 몇 마디 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부탁하는 액수의 딱 절반만큼의 돈을 가불 해주던 송팀장이었다.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정섭 씨는 한참 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송팀장 욕을 퍼부었다.      


쏴아아아아.   

  

 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쏟아졌다. 정섭 씨는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도,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송팀장을 제외하고 나니,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 술 마시면 진상이 되는 정섭 씨를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 손절했다. 


전 와이프? 이혼한 아내가 잠시 떠올랐지만, 이미 이혼한 마당에 밥 먹을 돈이 없어 전화를 걸어 구걸한다는 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들? 아들은 이제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할까 말까 한 사이였다.     

 

 네가 커서 군대 다녀와 봐라. 아빠가 왜 이렇게 사는지 다 이해할 거다.라고 아들에게 어릴 때 수없이 말했다. 


그리고 아들이 커서 군대도 다녀오고, 어른이 되면 당연히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군대를 다녀온 지금까지도 정섭 씨가 지난날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정섭 씨는 아들을 생각하자 갑자기 열이 뻗쳤다. 


'아들 새끼도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데, 누가 나를 대우하겠냐?!!'


정섭 씨는 괜히 화를 아들에게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러 번 갔지만,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의 정섭 씨 같았으면, 한 번 전화를 걸어 아들이 받지 않으면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별로 안 받고 싶은가 보다. 누군 통화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기분도 달랐고, 주머니 사정도 달랐다. 


'어쭈 이놈 봐라?' 하면서.

     

다시 전화를 걸자 몇 번 울리다가 아들이 전화를 돌려버렸다.     


“이런 썅놈이!!”     


 정섭 씨는 화가 나서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지만, 아들은 단 한 차례도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화기를 아예 꺼놓아 버렸다. 


정섭 씨의 아들은 정섭 씨가 낮부터 또 술에 취했나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비가 오는 날. 늘 그랬던 것처럼.     


 정섭 씨는 오전 내내 울화통을 터뜨리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대면서 시간을 보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고, 배는 고프고, 속이 쓰렸다. 


아침에 피운 담배와 물 몇 잔. 그것이 정섭 씨 속으로 들어간 전부였다. 


허기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잠이나 좀 더 자볼까 하고 누워봤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와이씨!! 진짜!!”     


 정섭 씨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동안 자신을 스쳐 갔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오전이 그렇게 흘러가고 점심시간이 되자 여관방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된장찌개, 생선구이, 고기 굽는 냄새까지... 


냄새만 맡아도 보글보글 끓고, 지글지글 굽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나타났다. 


정섭 씨의 입에 침이 싹 고였다. 참다못한 정섭 씨가 바닥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 모래가 묻어있다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살짝 어지러웠다.

   

정섭 씨는 다시 스마트폰을 잡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송팀장.    

 

정섭 씨는 다시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도 송팀장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언제나 정섭 씨는 자신이 마지못해 일을 해주러 가는 것처럼 생색을 내곤 했었는데, 이번엔 송팀장에게 구걸을 하다시피 했다는 것.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이상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무거운 짐도 같이 나르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송팀장에게 다짐을 했다는 것. 


평소 자신이 말한 금액의 절반을 보내주던 송팀장이 이번엔 절반의 절반만 보내준다고 말한 것이었다.    

 

“오... 오만 원?! 송팀장. 그래도 내가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 이건 차비 밖에 안 되겠는데?”     


정섭 씨가 볼멘소리를 했다. 

     

“형. 그럼 그냥 함바집에 가서 드세요. 우리 요 앞전에 공사했던 곳. 형 집에서 가깝잖아요. 그냥 거기 가서 드시고 하나 달아놓으세요. 내가 계산할 테니까. 거긴 오늘 비 와도 해요.”     


“야! 그냥 돈을 좀 더 보내주면 안 되냐?!”     


“아, 나도 지금 돈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고 형은 돈 있으면 오늘처럼 비가 와서 쉬는 날엔 또 술 퍼마시고, 내일 아침에 몸이 안 좋아서 출근 못 한다고 그러겠죠!! 돈도 다 써버리고.”     


정확했다.     


정섭 씨는 그동안 딱 그렇게 살았으니. 


5만 원을 보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고, 다시 일을 나오라는 것엔 더욱더 감사해야 했다. 


정섭 씨는 얼른 은행 ATM기계로 가서 5만 원을 찾았다. 


평소에는 편의점 ATM 기계로 돈을 찾았는데, 편의점에서는 수수료가 천 원이 넘기 때문에 5만 원을 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섭 씨는 편의점보다는 조금 멀지만, 은행까지 걸어가서 5만 원을 찾아 지갑에 넣었다.  

    

텅 빈 지갑에 5만 원짜리 지폐가 들어가자 초라했던 마음도 다시 든든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돈. 쳇. 그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정섭 씨는 돈을 지갑에 채우자, 마음에도 여유가 차는 것을 느끼며 홀로 생각했다. 


돈! 그까짓 게 뭐라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돈은 단지 그까짓 게 아니었다. 


돈이 집 나가면 사랑도 따라 집 나간다는 공사장 선배의 명언처럼 지독한 돈! 돈! 돈! 때문에 이혼을 했고, 돈이 없어 아들이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고 무시하고 있으며, 돈 때문에 오늘도 송팀장에게 구걸을 해야만 했다.     

그.까.짓. 돈 때문에!     


젊은 시절 그토록 호기롭게 외쳤던 그까짓 돈! 정섭 씨는 자신이 무시했던 그까짓 돈에게 지금 무시당하며 살고 있었다.   

  

정섭 씨는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서 함바집으로 갔다. 


이 근처 현장의 공사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는데, 아직 완전히 다 끝난 것은 아니라 몇몇 함바집들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정섭 씨는 외상 장부를 뒤적였다.      


R.C.S   

  

찾았다. 


송팀장과 정섭 씨의 팀. 


RCS라고 겉면에 적힌 식당 외상 장부.   

  

 정섭 씨는 외상 장부에 1명이라 쓰고,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다시 장부를 툭 던져 놓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인부들이 현장에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함바집의 음식도 평소보다는 조촐하게 차려져 있었다.   

  

정섭 씨는 동그란 플라스틱 접시 하나를 들어 밥과 반찬을 그 위에 올려 담았다. 


국그릇에는 따로 국을 한 그릇 담아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시래기 된장국이다. 


평소보다는 간소하게 차려진 음식이었지만, 허기가 질대로 진 정섭 씨에게는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달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정섭 씨는 뜨거운 시래기 된장국을 몇 번이나 더 떠와서 마셨다. 


뜨거운데도 시원했다. 


그 속에 있는 시래기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속으로 송팀장과 이혼한 아내와 전화를 받지 않는 아들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씹었다.     


 동그란 접시를 가득 채워 두 번이나 비우고, 국을 네 그릇이나 비운 다음에서야 정섭 씨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밥을 다 먹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함바집 밖으로 나왔다. 


비를 맞지 않는 처마 아래에 의자가 죽 놓여 있었고, 오늘 현장에 출근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섭 씨도 이를 쑤시며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 투둑투둑  

   

 비는 아까보다는 조금 약해졌지만, 여전히 흩뿌리며 날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공사 현장. 



정섭 씨는 비가 오는 공사 현장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섭 씨의 평생 일터 공사 현장. 땀 흘리며 일을 하고, 돈을 벌어가는 곳.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가 내려도 기분이 좋았다. 


비가 오면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 아니라는 의미였고,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다 같이 현장 근처의 함바집에서 막걸리를 실컷 마시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일을 하는 날에는 돈을 벌어서 좋았지만, 몸이 힘들어서 싫었고, 비가 내려 일을 하지 못하는 날에는 돈을 못 벌어서 아쉬웠지만, 다 함께 술을 퍼마시며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다 혼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늦잠을 잤는데, 나를 뺀 모두가 일을 하고 있는 맑은 날에는, 출근을 하지 못해 집에서 놀면서도 기분이 참 더러웠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생각에. 


나 혼자 뒤처지고 버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요즘엔 사람들이 정이 없어서, 비가 오면 다들 집으로 냉큼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담배를 피우면서 공사현장을 보며 멍 때리기에 참 좋은 날이다.     


비에 젖은 시멘트는 새까맸다. 


평소 같으면 망치질 소리와 중장비 돌아가는 기계음이 가득한 현장이지만 오늘은 빗소리만 가득했다.      


 정섭 씨는 담배를 한 모금 길에 빨아들여서 후우 내뿜었다. 하얀 담배연기가 내리는 비를 스치며 흩어졌다.     

현장은 참 공평했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나, 별 볼일 없이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땀 흘리며 일했다.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 사람은 허풍이 심했기에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필요는 없었지만, 정섭 씨가 만난 사람들 중 절반의 사람만이라도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정섭 씨는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한때 잘 나갔던 사람도, 자신과 함께 현장에서 똑같은 일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때로는 그런 잘 나갔던 사람에게 자신이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현장에 굴러들어 온 사람들의 사연은 내리는 빗방울보다 더 많았고, 더 다양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있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쫄딱 망한 사람. 

     

안정적인 공기업에 다니다가, 반복되는 안정적인 일상이 무료해 아내 명의로 치킨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공기업을 그만두고 장사에 전념했다가 근처에 브랜드 치킨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망해버린 사람.  

   

주식투자를 했다가 망한 사람, 코인에 손을 댔다가 지인의 전세 보증금까지 다 날려 먹고 자살시도를 했다가 실패하고 온 사람.     


보이스 피싱을 당해서 집과 가게를 날려 먹은 사람. 


의료기기 판매 영업사원으로 잘 나가던 사람인데, 의사의 요청에 수술 집도의 일부를 담당하다가 걸려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  

    

작게 시작했던 사업이 점점 더 커지고, 번창했는데, 종업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소송을 당하고 재산분할 후 사업유지가 어려워져서 망한 사람 등등. 사연들이 너무나 다양했다.    

 

사업이 잘된(?) 사람들의 경우-물론 검증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여자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사업이 잘되면 여자가 붙는다고 했다. 


'지랄하고 있네. 여자가 무슨 자석이냐? 가만히 있는데 붙게? 돈 좀 있고, 시간 있으니까 발정 난 수캐처럼 껄떡대고 여기저기 쑤시며 돌아다닌 거지.'

     

잘살아본 적이 없는 정섭 씨는 이런 류의 인간들이 참 갑갑했다. 


아니, 돈 많이 벌겠다, 잘 살겠다. 뭐가 아쉬워서 그 지랄을 하다가 가정이 엉망이 되느냔 말이다. 


그냥 가족들과 여행이나 다니고,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나는 잘 먹고, 잘 살 돈이 없어서 아내가 떠나버렸지만.

     

 갑갑한 인간들. 돈 귀한 줄 모르고, 돈 좀 있다고 뻘짓거리 한 너네들은 걍 이렇게 공사판에서 고생하며 살아도 싸다 싸.     


 정섭 씨는 타닥타닥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우면서, 지난날 마치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말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렸다가 담배연기와 함께 날려버렸다. 


'병신들. 그냥 그대로만 살았으면 이런 데 오지는 않았을 건데.'    

 

정섭 씨는 자신이 평생 일을 한 공사현장이면서,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을 병신 취급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혼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날 공사 현장을 찾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여름으로 곧 태풍이 올 거라고 현장에 바람에 날릴 만한 물건들을 다 치우고, 철사로 엮을 건 엮어서 고정해야 한다고 했다. 


잠시 현장에 들르는 거라서 당연히 일당은 없었다.      


“제가 갈게요.”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자신이 먼저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 부탁을 했더라도 투덜투덜거리며 하기 싫어했을 터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냥 현장에 나가보고 싶었다.  

   

“정섭이 니가?”     


“예. 제가 가면 안 돼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알았어. 그럼 부탁 좀 하자. 현장 단도리 좀 잘하고 와라. 바람에 날아가는 거 없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섭 씨는 홀로 현장에 갔다. 


그 크고 넓은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레인 기사도 없었고, 시멘트를 타설 하는 사람도 없었고, 철근 작업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현장 감독도 없었다.

     

정섭 씨는 지난번 작업이 끝나고 나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홀로 주섬주섬 정리를 했다. 


비가 내렸지만, 급히 서둘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태풍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몰아칠 것이다. 


현장은 혼자서 정리를 하고 가면 되는 일이었고, 얼마 전 이혼을 하고 이제는 혼자였기에, 여관에는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정리는 천천히 느긋하게 하더라도 두 시간 이내에는 다 끝날 일들이었다. 


느릿느릿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정리가 다 끝났는데도 정섭 씨는 뭔가 아쉬운 듯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발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토루판 한쪽에 걸터앉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중심의 온도가 700도에서 800도에 이르는 담뱃불은 이 정도 내리는 비에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아내는 조정 기간에 이혼조정 담당 판사 앞에서 남편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여편네가! 술 때문에 이혼을 해야 한다면, 우리 아버지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이혼해야겠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툭하면 어머니를 줘 패기까지도 했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하늘처럼 받들고 살았는데?!!     


내가 때리기를 했냐??!! 처맞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술 좀 마시는 게 그게 뭐 그리 큰 흠이 된다고!! 그래! 술 때문에 이혼을 하고 싶다면 나도 미련 없다!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무슨 아내냐! 가라! 가! 망할 년!!    

 

정섭 씨는 씩씩 거리면서 담배를 피우며 아내를 욕했다. 


이혼? 까짓 거 별거 없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해봤고, 이별도 해봤다! 헤어지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잠깐일 뿐이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금세 잊을 것이 뻔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정섭 씨는 스스로 계속 괜찮을 거라고 다짐했다. 정말 괜찮을 거라고. 아내 욕을 하면서 괜찮을 거라고 무수히도 다짐을 하는데, 빗물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섭 씨는 당황스러웠다. 겨우 이혼을 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운 눈물은 쉼 없이 계속 흘렀다.  

   

 한참 동안 아무도 없는 공사 현장에서 홀로 흐느껴 울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내와 헤어졌다고 울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면 무척이나 쪽팔리는 일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어야만 했다. 


그제야 정섭 씨는 단순히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것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이혼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컷 울었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만큼. 다른 어느 곳보다 지금 이곳 정섭 씨의 평생직장인 비가 내리는 공사 현장이 눈물을 흘리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갑갑하게 속을 막고 있던 무언가를 다 밭아낸 것 같은 기분?

     

 문득 정섭 씨는 공사현장에서 울어본 사람이 자신 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많은 사연을 품고 현장에 발을 들인 사람들 중에서 눈물을 쏟은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더 피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공사장 한쪽에 쌓인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정섭 씨는 오래전 어릴 때 봤던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루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모래요정 바람돌이.    

           

비 내리는 함바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정섭 씨는 이혼을 하고 홀로 텅 빈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 마누라한테 이혼당하고 실컷 울다가 갑자기 그게 왜 떠올랐지?’ 

    

 정섭 씨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어릴 때 봤던 만화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이. 


어릴 때 본 이후로, 그동안 자라면서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도대체 왜? 

    

 정섭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담배를 빗물에 던졌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담뱃불은 금세 꺼졌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는 물에 젖는 걸 싫어해서 비를 엄청 싫어했다. 


그러니 비가 내리는 날 떠올랐다는 것은 더 이상했다. 


정섭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비를 맞으며 걸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의 소원은 해가 지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내용을 상기하며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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