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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Dec 14. 2023

칼국수를 싫어합니다만.

칼국수

회사 근처에 농장 직송을 내걸고 장사하는 개고기 식당이 있었다.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개 농장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란 걸 알 것이다. 나는 개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셋째 고모의 남편이 시골에서 개 농장을 운영했었다. 텃밭 옆에 자리한 수십 개의 우리는 그늘막도 없이 뜨거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고 그 안에 갇힌 앙상한 개들은 시뻘건 눈을 하고 같은 자리를 하염없이 돌았다. 하얀 거품이 일어난 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붐볐다. 그들은 식당 앞에서 이를 쑤시고 트림을 해댔다. 그때마다 나는 병든 개들을 떠올렸다. 병들고 아픈 개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고 여길 그들이 역겨웠고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하고 멍청하다고도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날이면 그 식당 앞을 지나가야만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개고기를 삶아대는 통에 그 일대가 개고기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 냄새를 맡기 싫어서 숨을 참고 단숨에 지나갈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건널목 앞에서 좀처럼 멈춰주지 않는 차들 때문에 고스란히 그 냄새를 들이켜야 했다. 그 냄새가 의외로 역겹지 않다고 여기는 내 후각이 진저리 치게 곤욕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제는 그 냄새를 맡을 일이 없다. 개와 함께 살고 개를 사랑한다면서도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를 먹는다는 그녀도 다시는 볼 일이 없다. 퇴사했기 때문이다.    

  

퇴사 후에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음식은 또 있다. 그것은 ‘칼국수’. 지금껏 칼국수를 싫어한다고 말한 사람은 딱 한 명 봤다. 칼국수는 싫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평범한 음식인 거다. 하지만 나는 칼국수를 정말 싫어한다.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해산물 칼국수도 고추장을 풀어 넣은 칼칼한 장칼국수도 멸치 다시다 맛이 진동하는 칼국수도 샤부샤부를 먹고 난 뒤에 먹는 칼국수조차.      


내가 다니던 회사는 따로 점심을 먹는 것을 용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칼국수 가게는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메뉴 통일이 되고 빨리 나왔으며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18년 동안 일주일에 1~2번은 꼭 먹었다. 칼국수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 같았다. 남편까지 칼국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씩 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고 대체로 나는 그의 요구에 응할 때 보단 거절할 때가 많았다. 싫어하는 음식을 굳이 권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먹어주는 나의 배려를 모르는 게 더 싫었다.      


함께 음식을 먹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된다. 나는 친하든 친하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먹지 못하는지를 기억하는 편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배려의 방법이다.      


M은 튀긴 거라면 다 좋아하고 회를 못 먹는다. S는 닭 목뼈를 발라 먹기를 좋아하고 치즈나 크림 종류는 죄다 싫어한다. Y는 김 빠진 콜라를 좋아하고 콩국수를 못 먹고. K는 직접 밀은 손수제비를 좋아하고 매운 것을 못지 못하며 H는 쫄깃한 식감을 좋아하고 오이를 질색한다.    

 

하나같이 다른 취향을 가진 그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면 묘하게 기뻤다. 음식 취향으로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없지만, 메뉴를 고르는 과정이나, 음식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을 보면 어떤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가 있다.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보단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자고 했던 사람이었고 언제나 내 접시에 가장 크고 맛있는 부위를 올려 주었다. 맛집을 발견하면 매번 나를 데려갔고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어도, 그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더 먹고 싶은 척했다. 우리는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 점점 그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게 되고 이제는 그 어떤 음식도 함께 먹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음식물을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은 참으로 솔직하다. 생과 직결된 행위라 그런 걸까. 한마디의 말없이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대하는 본인의 모습까지 제대로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어 보인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는 내가 칼국수를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칼국수를 먹자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칼국수를 먹기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울분까지 덤으로 얹어서 마치 그를 비건에게 동물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인 듯이 대했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는 칼국수를 먹을 일이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개고기에 대한 입장은 바뀔 여지가 없지만, 칼국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조금 바뀌었다. 칼국수가 여전히 싫지만 누군가가 칼국수를 먹자고 한다면 이제는 기꺼이 함께 먹어줄 생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칼국수 한 그릇 정도의 거리와 여유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위해 싫어하는 것을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것을 점차 줄여나가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칼국수 한 그릇 정도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억지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운 맘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하는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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