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삶의 첫 걸음
화홰권고결정문이 법원에 접수되고 2주 후
확정된 서류를 가지고 구청을 방문했다
이혼서류를 접수하고 다음날 곧바로 서류정리가 되었고
가족증명서에서 그의 이름, 그의 가족이 모두 사라지고
돌아가진 아빠, 엄마 나 딱 세명만이 가족증명서에 출력되었다
(상세증명세에는 아이가 나오지만 일반가족증명서에서는 나오지않는다)
구청에 방문했던 그 날은 내 마흔 넷의 생일 날이였다
내 생일이 부부로써의 마지막 날이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나라는 구나...'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던가
이 말도 안되는 모든 상황을 극복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였다
내 마음대로의 방식으로 이해해해보려는 것
나이도 하필이면 '44'이다.
다른 사유로 인생의 힘든 굴곡을 지나는 동갑내는 친구가 그랬다
"마흔넷의 나이가 그냥 죽어라 죽어라 하는건가 싶다."
"에이~아니지.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라는거 아니겠나."
"그래되나?"
그러고선 우리 둘은 너털웃음을 한번 터뜨렸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모든 생명은 두번 태어난다고 한다
알로 태어나는 것이 한번, 알을 깨고 나는 것이 두번
날개를 단 모든 생명체는 두번 태어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날아오르는 그 값진 것을 얻기위해서는 그만큼의 인내와 고통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어쩌면 날아 오르기위한 그 전의 고통의 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온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 남편이 이혼을 진행하며 하고 다닌 말이있었다
내가 날개달고 날아가고 싶어 하니 맘껏 날아가라고 놓아주는거라고
(끝까지 본인은 멋있어 보이려고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솔직히 그 말을 속으로는 매우 비웃고 있었는데
막상 진짜 혼자가 되고 나니 정말로 내게 '날개'를 달아준게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혼자로써 사는 삶은 어떤게 맞는걸지 혼돈스럽기도 했다
각지를 돌아가면서 1년씩 살아볼까..
여행갔다가 꽂힌 곳이 있으면 그냥 그 동네 머물어 살아볼까...
꿈꾸는 모든 것들은 실제 가능한 일들이였고
앞으로의 일을 꿈꿔보는건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주도적이고 자립적이며 때로는 과감한 사람이였다
혼자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었고
혼자 잠들어야 하는 밤이 무섭지도 않았다
적응력이 좋아서 전혀 아무도 모르곳서도 살 수 있었고
오히려 나에게는 그것이 필요한 상태였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힘들었으니
사람으로 지치고 찢어진 마음이 회복되는데에
당분간 관계들을 멀리하는 시간이 내게 필요한 상황이였다
하지만 당시 이미 취직했던 직장이 있기도 했고
아직은 어린 아이를 두고 다른 지역을 선택하기는 힘들었다
(내가 사는 곳을 혼자 올 수 있을 만큼 컸을때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2~3년 정도 뒤에는 꼭 한번은 제주도에 살아보고
한번은 서울에 살아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내 직업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 수학 강사였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또 하나의 장점이였던 것이다
"이 정도면 돌싱에 특화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나한테 딱 맞다."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이혼 얘기가 안나올 수 없고
좋은 얘기는 아니다 보니 부정적인 얘기가 자꾸 나오게 되는데
난 그런게 싫었고 '해학의 민족'답게 우스게 소리로 무거운 분위기를 희석시켰다
그렇다고 정말 마냥 좋기만 했겠는가
아이들과 손잡고 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시댁 어른들 모시고 가족 나들이 나온 모습을 보면
나 혼자만 가정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가슴 깊숙한 곳이 시려왔다
남편은 몰라도 시댁식구들과는 한번도 안좋은 적이 없었다
특히나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돈독했고
친정에서 경험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그 가족안에서 채우며 살았었다
하지만 당연히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였고
마지막 순간이 되자 그 누구보다도 매정하고 냉정하고 매몰차게 뒤돌아 서는 그들이였다
당연한 일이였겠지만... 내가 아픈것도 별 수 없는 일이였다
힘들고 안좋았던 일도 많았지만 좋은 기억도 있기에 아픈 것이였다
아직은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게 마냥 자유로움이라기 보단
무엇을 붙들고 뭘 목표로 살며 어떤걸 우선순위에 둬야할지 모르는 '불안'으로 느껴졌다
이제 내가 아니면 돈을 벌 사람이 없고
모아논 비상금이나 자본이 전혀 없는 상황이였고
재산분할로 받을 금액은 너무도 작았고
나는 국민연금도 개인연금도 없어서 노후대비고 뭐고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다
뭐든 지금부터 다식 시작해야했다
마흔넷의 나이가 젊을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다
적은 나이가 아닌건 맞지만 사회 생활 시작한지 이제 3년차의 내가 아닌가..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든 건강이든 체력이든 허락하니 얼마나 감사한가
지금은 당장의 현실도 어찌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당분간은 금전적으로 계속 마이너스의 삶을 살아야하는 나였다
그러니 앞날을 준비하고 대비한다는게 아직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작은 항상 미약하고 두려움만 가득한 것이 당연하다
'미래'를 미리알 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공평하다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아내'이자 '엄마'였고 '며느리'이자 '주부'였던 그 모든 이름표를 내던지고
오직 내 이름 석자로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프다
불안과 두려움이 내 마음안을 지배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에 연연하는 성격의 내가 아니다
내가 이제부터 선택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새롭게 시작되는 내 인생의 첫발을 설레임을 가지고 딛어보려한다
부부로써 마지막이였던 내 생일
그날 나는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아직 날개도 젖어있고 눈도 채 떠지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비상'할꺼라는 그 믿음으로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길에 첫 걸음을 딛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