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충 전쟁을 벌였다는 말을 순화해 사용하고 있다. 이 문장을 적기 전에 박 터지게 싸웠다, 이혼서류를 써서 가정법원 들어가기 직전까지 등등의 표현을 생각했지만 어쩐지 부끄러워 도저히 적을 수 없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그래도 잘 살아보세라고 마무리 했다.
남편은 몇년 전 주식과 부동산에 과감히 투자했다. 몇년이 흐른 후 손실을 보고 있다. 모두 내가 하지 말라고 했던 투자였다. 그의 항변은 자신은 장기투자형이며 또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데 어쨌거나. 본인 돈으로 한 투자니까 그냥 뼈아픈 교훈이었길 바란다. (제발 그래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잘 헤어져보세라는 결말로 바뀔지도.)
우리는 투자를 각각 따로 한다.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알아서 투자하는 시스템이다. 나의 투자 수익률은 남편에게 한번도 져본 적이 없다. 이 팩트를 짚어줄 땐 남편은 자존심이 상해 한다. 나는 여자고 본인은 남자니까 금융지식과 선택이 더 뛰어나다는 믿음을 꺾을 생각이 없나보다.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내면에서 남성우월주의적인 무의식이 꿈틀대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거 하나 남은 것까지 긁어내서 때려부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원래 남자란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려니 하자.
물론 이것마저 꼴보기 싫으면 같이 안살면 되는거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애초에 안하면 안했지, 결정적인 결격사유(외도, 폭력, 도박 등)가 없는 이상 이혼은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한다. 물론 깔끔하게 이혼을 선택한 이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사연은 다 제각각이다.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나의 현재 삶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1살 짜리 아기를 키워야 하고, 남편은 나름 성실한 편이며, (나의 지X맞은 성격에 비해) 성질이 유순하고, 내 주장에 심하게 반항하고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결국엔 하자는대로 따라주고 경청해준다. 장점을 바라보려 한다.
이혼이 비합리적이라 생각한 이유는 우리나라 제도적 특성 때문에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부부가 이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어? 그래 알았어 라고 순순히 갈라서게 해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들어갈땐 니맘대로 들어왔지만 나갈땐 온갖 장애물과 허들을 넘어야만 한다. 가장 원만하다고 알려진 합의 이혼의 경우에도 부부가 가정법원에 함께 시간 맞춰 들어가서 오랜 시간에 거쳐 부부상담이라는 것을 받아야 하며, 숙려기간이라는 것도 있다. 물리적 시간과 나의 노동이 꽤나 든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일에는 왠만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말자는게 내 원칙이다. 아기가 없으면 고려해봤을 수도 있지만 나의 하루는 생산해내는 시간 외에는 전부 육아에 쏟고 있다. 그럴 시간에 아기 동화책 한권 더 읽어주거나 주식공부를 하는게 백 배 더 낫다.
두번째 이유는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한번 때려치기 시작하면 다음번에도 쉽게 때려칠 가능성이 크다. 관계 뿐만이 아니라 일에서도 그렇다. 일을 이것저것 건드렸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메뚜기처럼 뛰어다녀선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건 수확할게 없다는 뜻이다. 두번, 세번 이혼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직하게 버티는데 관성이 붙는다면 몇년 후에도 계속 살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일단 버텨내는거다.
흔들릴 땐 목표를 다잡으면 된다. <세의노의 가르침> 저자 세이노는 '비빌 언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면 결혼 후 5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시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면 당신들은 평생 부자가 되기 힘들다. 혼인 비용을 최대로 줄이고 현금을 보유해라. 가구도 가장 싼 것으로 장만하고 그 어떤 것이건 간에 중고 물품도 고려해 보라. 호사스러운 혼수품도 5년 후면 고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라고 말했다.
세상 속 편히 게임이나 하고 있는 남편에게 가정의 목표를 매일매일 세뇌(?)시키려 한다. 지금으로선 그것밖에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똑 떨어지는 해결책이 없으니 일단은 유지한다. 우왕좌왕하다 뻘짓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의 근 5년 목표는 일단 경제적인 몸값을 올리는데 최우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아기를 스스로 엉덩이를 닦을 수 있을 정도까진 건강하게 키워내야 한다. 투자금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불려나가야 한다.
다음번엔 결혼할 사람 고르는 법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 비약이 섞여있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결혼은 택시와 비슷하다. 승객은 택시 기사를 잘 알고 고르는게 아니다. 하지만 한번 탄 이상, 목적지까지 도착하지 않는 한 내리는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상한 택시 기사를 만나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게 공통점이다.
나는 아직 택시를 타지 않은 분들께, 가능하면 대중교통 이용하거나 자차를 타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눈썰미와 운을 한번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도 덧붙이려 한다. 좋은 택시 기사는 지름길을 안다. 승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줄도 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훨씬 빨리 도착하게 만들어준다. 가정법원을 찾아 가기 전에, 나 스스로는 어떤 택시 기사인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