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고보니 문득문득 떠오르는 20대의 조각들이 있다.
누가 20대를 찬란한 청춘이라 했지?
나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집안이 완전히 망했다.
인생을 통틀어 그 시절에 괴로운 기억들이 가장 많다.
아버지는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내가 고3 때, 특정당 표밭이라는 지역에 온갖 로비 끝에 간신히 공천을 받았다. 집을 팔아서 거의 전재산을 들여 선거 비용으로 썼다. 그 결과 압도적으로 선거에서 낙선했다. 잘나가는 정치인 자식들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실패한 정치인 자식들은 집안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수험생일 때 집안이 그렇게 돼서 수능도 평소보다 쫌 망쳤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계획성 있게 꼼꼼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과 어떤 시도가 실패했을 때의 가능성을 떠올려보고 대비하는 사람이 있다. 한결같이 '오늘만 사는 타입'도 있다. 아버지는 일평생 "선거에 당선만 되면"이라는 말을 가정해 그 뒤에 있을 장밋빛 인생을 그리셨다. 하지만 한번도 그게 이뤄진 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정치인이 결국 한번도 되어보지 못했다는게, 그가 어쩌면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그랬던걸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결과 가족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나는 서울에 대학을 다니느라 홀로 자취했다. 대학에 입학하면 신입생들은 OT를 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학교의 여러 행사들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동기, 과 선배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나는 집안이 쫄딱 망해서 그럴 시간도, 여유도 한참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일본식 라멘가게와 동물병원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와중에 모델이 되고 싶어서 연습생활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나의 개인 일정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희대 신입생들은 '본관 놀이'라는 걸 한다. 4월 정도 되면 벚꽃 피는 본관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으며 음악을 듣고 노는거다. 과제 하고, 알바 뛰느라 머릿속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걸 해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가지면 엉덩이가 근질하다. 지나가다 붙잡혀서 겨우 앉으면, 한시간도 못버텼다.
당연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키가 훌쩍 크고, 비쩍 말라서 눈에 잘 띄긴 띄는데, 도통 어울리지 않으니 동기들은 나를 '재수없고 속을 알 수 없는 애'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행사에 불참했고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게 역효과였다. 표정이 어두움에 절여져서 다크한 아우라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거기다 무슨 모델을 한다고 바쁜척 해댔으니. 어느순간부터 같은 과 동기 여자애들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무시했고, 나를 제외한 무리 같은게 만들어졌다. 그냥 끔찍한 왕따였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전교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을 보였던 나였는데, 대학교에 가니 음침한 아웃싸이더 취급을 받으니 스스로도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던 기분도 익숙하지 않아서 계속 당황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너무 예쁘다는 이유로 일진들한테 따돌림을 당한 적은 있었는데 (죄송), 어느순간 학교에 있는 모두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을 원망할 것도 없는 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지금 다시 학교로 돌아가 다시 다니라고 하면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밥 먹자 하면 돈 없어서 밥 못 먹는다 솔직히 말하고, 수업 끝나고 어딜 그렇게 뛰어가냐고 하면 강아지랑 고양이 돌보는 알바하러 간다고, 집이 망해서 그렇다고 다 털어놓을거다. 그런데 그때는 꼴에 자존심 지킨다고 말을 안했다. 다들 내가 잘 사는 집의 콧대 높은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기들하곤 놀지도 않는, 그런 재수없는 애.
그렇게 마분지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어떤 순하게 생긴 남자애가 되게 귀엽게 계속 똥개처럼 내 주변을 맴도는거다. 수강신청할 때 어떤 수업 듣는지 물어보고, 대답하면 그 수업에 본인도 와 있고. 끝나고 이동할 때 내 옆에 붙어서 같이 가고. 그 넓은 캠퍼스에서 말 한마디도 안하고 집에 갈 때가 많았는데, 걔가 있으면 내 목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 되게 편했다.
동기 사이에서 그애 별명이 '김못생'이었다. 12학번 중에 제일 못생긴 남자애라고. 그런데 내 눈엔 걔가 왜 귀여웠지? 키도 컸고, 날씬했고, 쌍꺼풀 없는 눈이 좋았다. 빅뱅의 대성을 닮은 인상이었는데, 나는 원래 빅뱅 중에 대성을 제일 좋아했다. 어느날 그 친구가 고백을 했고, 우린 사귀게 됐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핵인싸였는데, 그 친구를 통해 동기들 사이에 피어나는 내 오해들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집이 엄청 금수저라는 오해가 가장 웃겼다. 그냥 외모가 고급스럽게 생겼을 뿐인데 그런 오해를 평생 진짜 많이 받는 것 같다. (^^;죄송,,,)
나는 그 친구가 스스럼 없이 다가와준 성격 같은게 너무 좋았는데 자꾸 그 친구가 내 앞에서 자신감을 잃어 했다. 식당을 갈 때도 "너는 이런거 안먹지?" 하면서 어려워 하고, 자기가 사는 곳을 이야기 할 때도 "내가 사는 지역 같은데는 가본 적은 없지?" 하면서 내 눈치를 봤다. 동기들 사이에서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나자, 외모 차이 갖고도 말이 많았다. '천하의 잘난척 왕재수 모델 김지아가 김못생하고 사귄다니!!'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내 앞에서 "내가 너무 못생긴 것 같다"는 말을 해댔다.
내 삶이 너무 여유가 없었고 나만의 문제로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그 친구의 부족한 자존감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결국 50일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오래 사귀지 못하고 이별했다. 하지만 20대에 한줄기 빛이 되어줬던, 반짝반짝했던 날들이 있었다면 그 친구와 캠퍼스를 걷고 이야기 나누던 시간 같다. 이상한 농담 같은걸 많이 했는데 재밌었다. 나의 블랙 코미디 스타일의 유머 코드와도 잘 맞았고.
동기들 하나 둘 결혼소식 들려오는데, 그 친구는 SNS를 안해서 염탐도 못하고 있다. 잘 살거라 믿는다. 귀여운 똥개들은 어딜 가나 사랑 받는 법이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믿는 여자를 만나길 바란다. 스무살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BzYnNdJhZ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