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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Nov 15. 2024

연봉 5억을 벌었던 엄마

만화영화 란마를 아시는 분 계시리라 생각한다. 란마는 차가운 물을 부으면 여자가 되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남자가 되는 캐릭터다.




오늘은 한국광고홍보학회에서 주관하는 '지속가능(ESG) 브랜드·기업 대상' 시상식 진행을 봤다. 학교 다닐 때 지도교수님이셨던 경희대 미디어학과 이정교 교수님께서 학회 회장님이도 하신데, 시상식 진행자가 필요하다며 나를 호출하셨다. 교수님께선 잘 못해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전날밤 몇번이나 연습을 해갔다. 다행히 무사히 잘 끝났다.


행사 위치는 공덕에 위치한 더 가든호텔이었다. 집에서 갈땐 자전거를 타고 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차가 많이 밀릴 것 같아서다. 자전거 탈 땐 청바지를 입고, 진행을 볼 땐 몸에 핏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진행을 봤다. 교수님께서 "운전해서 왔니" 라고 물으셔서, "예 자전거 운전이요ㅎㅎ" 하고 답했다.


나는 란마다. 필요시에 여성으로 변신한다. 여성으로 변할 때는 아름다워야 할 때다.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유익한 것이다.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일 건 없다. 남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들도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한다.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어린 아이들도 아름다운 것을 알아본다. 그래서 출산을 하고 나서도 몸을 가꾸고, 피부 관리를 하며 최대한 예뻐지기 위해 노력했다. 피곤하지 않냐고? 누굴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다. 내가 그렇게 하는게 기분이 좋다. 늘어진 뱃살과 쳐진 피부는 우울하다.



하지만 여성으로 사는게 불편할 때도 있다. 아까처럼 자전거를 탈 때다.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자전거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화장도 필요 이상으로 해야 한다. 오늘도 서울의 큰 대학의 광고 홍보 관련 분야의 교수님들이 전부 모이는 큰 행사 자리라, 샵에 들러 화장과 머리를 했다. 예쁘게 꾸미는 건 좋지만 속눈썹을 붙이고, 두꺼운 파운데이션을 바르며, 머리에 헤어스프레이를 칙칙 뿌리는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렇게 두시간을 앉아있노라면 엉덩이가 근질댄다.


밤에 혼자 공원을 간다거나, 이른 아침 등산을 하는 것도 남자가 아니라 못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여성분들도 계신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무섭다. 예전에 지독한 스토커한테 당해봐서 안다. 조금 깜깜하고 인적 없는 곳을 걷다보면 뒤에서 부시럭대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남자였다면 밤 늦게 다니는 거 덜 무섭지 않았을까 싶다. 아기 재우고 나면 10시인데, 나가서 뛰고 싶어도 잘 안나가게 된다. 남자들은 그런게 좀 부럽다.


미스코리아·슈퍼모델 대회에 출전할 때도 무대 위에서만 여성이었다. 나머지 순간에는 그냥 남자처럼 대기실 땅바닥에 누워서 자고, 머리 대충 물로 감고 그랬다. 그러니까,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면 대부분 남자처럼 사는게 아주 편하다.



하지만 남성성·여성성 이런 고정관념도 내 세대 이후론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오늘 메이크업 해주시는 분과 수다를 떨었는데, 남성 고객들이 정말 많아졌다는 말을 해주셨다. 남성 고객들도 두꺼운 화장을 하고, 심지어 색조화장까지 하고 간다는 말이었다. 성형외과에 남성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요새 남성들도 정말 뷰티에 많은 투자를 하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고보면 남자 돈, 학벌 다 필요 없고 잘생긴거 하나면 된다는 여자들도 종종 봤다. 남자가 여자 외모만 따지는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짓길 좋아한다. 그게 편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사고를 빠르고 직선적으로 하는데 도움을 준다. 문신을 하면 날라리 양아치고, 대학을 안나오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데다, 예외를 합쳐놓고 보면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질문하는 자는 언제나 고정관념과 싸워야 한다. 설령 그게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그래야 한다. 세상은 효율과 비효율의 논리로 흐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란마가 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컸다. 앞서 말했듯 아버지는 집안을 자주 말아먹는 데에 재능과 능력이 특화된 분이셨다.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말아먹으면, 엄마가 어떻게든 다시 폐허 속에 세우고, 재산을 끌어모았다. 부부 중 한 사람만 제정신이 박혀있어도 가문은 멸망하지 않는다. (물론 둘다 제정신인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나의 조상을 살펴보면, 우리 집안은 모계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할머니는 젊을 적 사별하셨다. 외할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홀로 4명의 어린 딸들을 키워내셨다. 그래도 네 자매를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다. 이는 외할아버지와의 사별이 가계에 큰 타격을 준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살아계실 적에도 중증의 알콜중독자셨어서 할머니는 홀로 시장에서 나물 팔아 생활비를 버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길거리에 나물, 콩 같은거 파는 할머니들을 못 지나치는 편이다.


나의 엄마는 커리어 전성기 시절, 연봉으로 5억을 벌었다. 그렇게 24시간을 너무 열심히 일하다 눈에 충격이 와, 황반변성을 앓게 됐다. 황반변성은 시력을 완전히 잃을수도 있는 병이다. 이대로 계속 일하다간 장님이 된다는 말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엔 본격적으로 투자자의 길을 걸었다. 재테크 또한 능해서 쫄딱 망한 집안의 재산을 지킨 비결은 모두 그녀의 투자능력에 있다. 무척 이른 시기 냄새를 맡고 진입해 현재 비트코인 N개를 갖고 있다. (N은 자연수다.)


나는 확신한다. 의지가 있는 여성들은 더 많이 노동시장에 머물러야 한다. 그게 남성도 살리고, 아기도 살리는 방법이다. 우리 외할아버지처럼 남성이 갑자기 죽거나, 우리 아빠처럼 집안의 가산을 탕진하는데 쓴다면, 그 집안을 구제할 사람은 여성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남성들이 육아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해야 한다. 다행히 나의 남편은 육아를 좋아하고, 참 잘한다. 하루종일 아기를 돌봐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너무 행복하다고만 한다. 그래서 나도 더더욱 맘 푹 놓고 일하러 다닌다. 밖에서 일할땐 물론 남자 란마가 된다.


그리고 내 딸아이도 란마처럼 키울 예정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엄마가 모범을 보이면 된다. 나의 엄마가 그랬고, 나의 엄마의 엄마가 그렇게 사셨다. 그분들의 DNA가 내 딸에게 보여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fDpQVaUk&pp=ygUK656A66eIIG9zd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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