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사찰에 가서 일주일 정도 머무른 적이 있다. 그 시절 나는 불교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있는 줄 알았으니 말 다 했다. 수계도 받지 않고 법명도 없는 상태로 잠시 절에 기거하게 된 나에게 사찰의 모든 것은 익숙하지 않게 다가왔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살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나는 불자 아닌 불자로 떠도는 상태여서 그랬는지 보살이라고 부르며 나를 공동체 안에 넣어준 것이 참으로 민망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상태인데 누가 불교에 관해서 물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것이다.
절에 머무르면 소일거리라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먹고 잔 것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이 야물지 못한 내가 뭔가를 한다는 것은 뭔가를 망칠 가능성이 크므로 며칠을 어슬렁대며 놀기에 바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나에게도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팥빙수 만들기! 팥빙수를 파는 분이 잠시 외출을 해야 하니 나에게 가게를 맡아달라고 하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날 손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어찌나 간절히 빌었는지 모른다. 나는 팥 알레르기가 있어서 팥빙수 맛을 모른다. 그런 나에게 하필 팥빙수를 만들라고 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빙수 만드는 것이 무에 어렵다고 거절할꼬, 하라면 해야지. 그러나 맛도 모르는 팥빙수를 만들어야 한다는 무게감은 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사람 하나 겨우 앉을 수 있는 나무 공간에 갇혀 손님아, 오지 말아라~ 손님아, 오지 말아라~라고 외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님이 와 버렸다. 이왕 손님이 온 거 최선을 다하자! 나는 재빨리 얼음을 갈고 연유를 넣고 과일도 넣고 대미를 장식할 팥을 넣었다. 가게 주인은 아는 사람에게 팥을 한 숟가락 더 넣어주던데 나는 가게 주인이 아니라서 고민이 된다. 재료를 낭비했다고 혼나면 어쩌지, 내가 재료를 막 퍼줘서 손해를 보면 어쩌지라는 갈등의 늪에 빠졌다. 찰나의 순간 별별 고민을 하다가 적당히 넣어주기로 나와 합의했다. 그렇게 손님이 여러 명 왔다 갔고 어찌어찌 잘 돼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아니, 젊은 보살이 왜 이렇게 야박해. 원래 주인은 그릇 가득 팥을 넣어주더구먼! 역시 주인이 와서 팔아야 해~ 아이고~ 팥 좀 더 담아 나와봐!
나는 그렇게 혼이 났고 팥빙수 파는 보살에게 욕을 먹인 것 같아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보살이 되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날 나는 보살계의 모든 분을 욕되게 한 느낌이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미륵보살님 이외의 모든 보살님께 죄송했다. 내가 팥을 너무 인색하게 넣었기 때문에 괜히 젊은 보살이 야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훗날, 그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그래서, 신도들한테 보살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말이다. 감히 보살이라는 단어를 쉽게 가져다 붙이면 보살님을 욕되게 하는 순간이 생기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전엔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르게 된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러면 원래는 뭐라고 불렀냐고 물었더니 노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시주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자 신도들을 보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
남편의 추측은 이렇다. 사찰에 와서 경제적 재원을 충당해 주는 행위를 보사(補寺)라고 하는데 그 일은 보통 신도들이 하게 돼 있다. 그래서 시주들이 보사를 했다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사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듣고 보살로 부른 것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보살의 보는 ‘菩(보살 보)’를 쓰지만, 보사의 보는 ‘補(도울 보)’를 쓴다. 그러나 한국어로 들으면 똑같은 발음의 ‘보’로 들리니 보사를 보살로 착각할 수 있을 법하다.
사바세계는 언제나 고통이고 인간은 누구나 계속해서 악업을 짓기 때문에 절에 다닌다고 해서 이 일을 멈추진 않는다. 한 번은 어떤 신도가 나를 붙잡고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의 사건은 이렇다. 새해를 맞이해서 모두 다 기도를 하러 영험한 곳에 갔는데 제를 지내고 난 뒤에 어떤 보살이 톡 튀어나와서 특정 스님에게만 따뜻한 차를 따라서 드렸다고 한다. 보온병에 차를 담아와서 김이 모락모락 났고 딱 봐도 양이 많았는데 딱 한 스님만 드리고 가버렸다고, 그 옆에 나이 든 스님들이 몇 분 더 있었는데 어쩜 그러냐고 말이다. 그전부터 그 보살이 그 스님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서 다들 못마땅했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마저 저러니 보기 흉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실수를 하므로 이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간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럴 때마다 보살에게 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살’이라는 이름을 넣어서 인간을 책망하고는 보살이라는 이름을 어지럽혔을까. 그러니 이제라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 듯하다.
예전처럼 ‘시주(施主, dāna-pati)님’이라고 부르거나 이를 음역 한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편한테 물어보니 호칭으로는 잘 안 쓴다고 하는데 시주나 단월도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단어를 찾아서 대체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보살에 관한 오해가 가득 찬 곳이 또 있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이름을 사유의 방이라고 붙였는데 정말 잘못된 이름이다. 내가 생각하니 존재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 맞지 않는데도 누가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 모르겠다. 미륵보살님이 하고 계신 것은 사유가 아니라 ‘정사유(正思惟)’다. 정사유란 반야바라밀다에 입각한 특별한 정신상태다. 여기서 반야라는 것은 ‘공(空)’으로 생각이 멈춘 상태라고 보면 된다.
사유는 인간이라면 다 할 수 있고 정사유는 특별한 불교적 수행으로 도달한 무엇인데 어찌 미륵보살님이 계신 방이 사유의 방이란 말인가. 방의 디자인도 문제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계시면 뒤편에는 장엄을 해야 한다. 장엄이란 불교 교리에 의해 장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인간을 사유하게 하려니 그 어떤 장엄도 없이 황토 같은 느낌으로 벽을 만들어 두었다. 미륵보살 뒤는 보통 도솔천으로 장엄을 하는데 종교적으로 보면 전시가 매우 잘못 구현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도 불교 교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저 인간들이 가서 사진 찍기 좋은 상태로 꾸며놓은 것이다. 디자인이 나왔을 때 바로 잡을 이가 하나도 없었다니 정말 안타깝다. 이 사실을 알고도 그 어떤 불교단체에서도 항의를 안하니 더 속상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사유의 방이 아니라 정사유의 방이라고 고치고 교리에 맞게 방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누가 그 일을 수행할 것인지. 언어의 인플레이션, 언어의 트랜드화를 깨부수고 참다운 가치를 드러낼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