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저∨포기, 만복사∨저포기, 만복사∨저포∨기. 고등학생 때는 어떻게 띄어 읽어야 할지조차 몰라 너무도 어려웠던 만복사저포기. 이 소설은 금오신화에 수록된 작품으로 김시습이 지었다. 제목은 만복사에서 저포를 한 이야기 정도로 해석하면 되고 저포는 나무로 된 주사위 같은 것을 던지는 놀이(윷놀이라고 해석하는 곳도 있음)였다고 이해하면 된다.
금오신화는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고 수능에도 출제된 적이 있는 작품이기에 많은 사람이 읽어봤을 것이다. 그래서 읽고 난 후의 감상평. 어렵다! 고등학교 때 금오신화를 읽고 어려워서 몸을 비비 꼬고 또 꼰 기억밖에 없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문제는 또 왜 이리 어렵냐!
만복사지 전경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지금 생각해 보니 쉽게 읽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금오신화에는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 다시 읽은 금오신화는 정말로 좋은 소설이었다. 이제는 이해가 간다. 그중 만복사저포기가 괜히 마음에 와닿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만복사가 사라져 그 절터만 남았지만, 그 자취는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양생이라는 사람이 만복사 동쪽 끝 방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외로움을 달래며 시를 읊고 났더니 아름다운 베필을 만날 수 있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돌연 들렸다. 마침 다음 날은 만복사에 등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삼월 스무나흗날이어서 양생이 원대한 계획을 짠다. 사람들이 모두 소원을 빌고 돌아간 저녁 시간, 양생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부처님과 저포 내기를 했다.
양생은 부처님이 이기면 자기가 법연을 베풀어 제사를 올리고 부처님이 지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달라고 말했다. 결과는 양생의 승리. 양생은 조용히 불상 뒤로 숨어 약속이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진짜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윽고 둘은 인연을 맺기로 하고 날이 새도록 함께 놀았다.
만복사지 오층석탑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생은 여인의 집으로도 가 그곳에서 며칠을 놀며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사흘 뒤, 여인은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밝히고 은그릇을 내밀며 자신의 부모를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양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 있으니 여인의 부모가 놀라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냐고 묻는다. 여인의 부모는 여인이 왜구가 침입했을 때 해를 입어 죽었는데 골짜기에 임시로 묻었다가 드디어 저승 가는 길을 추도하는 날이라고, 지금 들고 있는 은그릇은 여인과 함께 묻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양생은 여인의 부모를 따라가 제사를 함께 올리며 여인의 영혼을 배웅한다.
이후 양생은 너무 슬퍼서 몇 날 며칠 여인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사흘 저녁이 되는 날 여인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렸다. 자신은 다른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당신도 깨끗한 업을 닦아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라고 말이다. 그렇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여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후, 양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데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오랜만에 읽으니 김시습이 엄청 공을 들여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오늘 잘 먹고 잘살며 아무 근심이 없으면 내세를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부족함이 없는데 어찌 훗날을 걱정할까.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이 너무도 괴롭다면 이제 윤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때야 극락이 보이고 다음 생애에는 극락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더더욱 간절해진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위제희 부인처럼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이 그렇다. 여인은 왜적에게 살해당한 뒤 구천을 떠돌며 괴로움에 허우적댔다. 그러니 사바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여인은 이승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태어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여인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는 ‘다른 나라’는 조선 땅을 벗어난 다른 나라가 아니라 ‘극락’이 아닐까.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소설을 읽으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었다. 부처님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지 여인을 주겠다는 약속하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저포 놀이를 하고 난 뒤, 내기에서 졌다고 여인을 주셨다? 엄청 특이했다. 부처님이 왜 그러셨을까? 정말 왜 그러셨을까? 하며 계속해서 고민했는데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김시습이 구현한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아, 맞네. 그렇다면 왜 하필 여인을 내기로 걸었을까. 이건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걸 보니 관세음보살님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윤회를 끊을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체였나? 어쩌면 양생이 답일지도 모른다.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찰에 살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끝이 없으나 아직 정답을 찾진 못했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광배 뒤에 새겨진 부처님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남편은 그녀 없는 삶은 필요 없다고 떠난 양생에게 감동해서 만복사저포기를 좋아한다고 매번 말했었다. 푸하. 뭔가 좀 닭살 돋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그래서 항상 만복사지에 가길 원했는데 마침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원을 지날 일이 생겼다. 남편은 이때다 싶어서 동행한 지인을 데리고 만복사지에 가서는 부처님한테 여인을 달라고 빌면 인연을 데려다 주시니, 얼른 기도하라고 했단다. 남편의 지인은 정말로 소원을 빌었고 놀랍게도 그 뒤에 여자친구가 생겼다. 계속 잘 만나고 계시는 걸 보니 만복사 부처님이 짝꿍을 보내주시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날 남편은 소설에서만 만나볼 수 있던 만복사지 부처님을 실제로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가웠다고 한다. 그렇게 삼배하고 부처님 뒤로 돌아 나오는데 깜짝 놀랐다. 광배 뒷면에도 부처님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걸 보고, 아~ 양생이 부처님 뒤로 숨은 이유가 이거구나 싶어 신기해하며 한참 바라보다 왔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부처님 아래에 숨었다고 돼 있는데 아래에 숨을 곳이 없다. 뒤로 숨는 게 맞는 듯하다. 그러니 만복사지에 가서 부처님께 인연을 내려달라고 부탁하실 분들은 부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삼배하고 뒤로 돌아가 광배 뒤에 새겨진 부처님께도 소원을 빌어보시길 바란다. 빠르면 오늘 밤에 들어주실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