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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을 길러준 미술 대회 출전

- 타인을 그림으로 설득해 보는 시간

by 재하

그림 공모전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의 어느 여름부터다. 유치원에서 애국가 부르기 대회가 있었는데 아이가 꼴찌를 했다며 대성통곡을 한 이후였다. 애국가 부르기 대회에 출전한 모든 아이에게 상을 줘서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가장 낮은 상인 은상을 받았다고 투덜댄다. 그 뒤로 아이는 상장과 트로피를 받고 싶어서 끙끙댔고 아이가 도전해 볼 만한 대회를 찾다 보니 그림 대회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는 어린이 미술대회에 한 발자국 내딛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도전한 것은 등대 그리기 대회, 그러나 아쉽게도 탈락. 등대가 왜 바닷가에 없고 산에 있어야 수상권에 드는 거냐며 아이가 억울해했다. 산속에 등대가 있는 곳에서 주최한 대회라서 그런 것 같다고 수상 비결을 모른 엄마가 미안하다고 다독였다.


그다음에 도전한 대회는 듣고 싶은 말과 듣기 싫은 말을 그리는 대회였는데 입선을 했다. 아이는 1등이냐고 여러 번 물었는데 1등은 아니지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시상식이 열리는 날, 경기 북부에 사는 우리는 경기 남부까지 상을 타러 긴 여행을 했다. 그리고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아이가 또 눈물을 흘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는 바탕을 칠하지 않으면 완성도가 낮아서 탈락한다고 말했는데 대상 수상 작품이 바탕을 칠하지 않은 것이다. 아이는 채점 기준에 매우 분노했다. 어떻게 미완성인 작품이 대상이냐고 씩씩거렸다. 대회마다 기준이 달라서 그럴 거라고 진정을 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아무튼, 상장이 생겼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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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미술 대회 도전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번은 가족 여행을 그리는 대회가 집 근처 대형 상점에서 열렸다. 아이는 비행기를 타고 맛있는 것을 먹는 장면, 엄마 아빠가 웃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제출했다. 결과는? 탈락! 그래도 마트에서 그림을 전시해 줘서 가보았다. 아이는 또 분개했다. 왜 국내 여행을 그린 아이만 상을 탄 거냐고 말이다. 자기보다 분명 못 그렸는데 국내 여행을 그렸다는 이유로 상을 줄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냐고 또 씩씩댄다. 또 진정시켰다. 그래도 대형 상점에 그림이 걸린 덕분에 친구들이 그림을 보고 연락을 많이 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뒤로는 민화 그리기 대회, 개구리 그리기 대회, 푸른 하늘 그리기 대회, 바다 생물 그리기 대회까지 진짜 안내 본 것이 없이 미친 듯이 그려서 보냈다. 그렇게 여덟 살에 제출한 그림은 모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초등학생이 되자 나름의 일정 때문에 2학기에는 그림 대회에 출전을 못 했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던 대회는 아홉 살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볼 땐 정말 잘 그린 개구리 대회 입상 실패, 제약 회사 동물 캐릭터 그리기 대회 입상 실패, 김밥 그리기 대회도 입상 실패. 그렇게 실패의 기록이 쌓여가던 어느 날, 드디어 입상 소식이 들렸다. 자신의 장래희망을 그린 그림으로 은상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그림 대회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도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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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탈락한 민화 대회에 다시 도전해 보겠다며 아이는 민화 전시회에 가서 자신이 그릴 동물을 열심히 보고 왔다. 도서관에 갔다가 어린이 민화 책이 있길래 빌려줬더니 동물의 특징 중에 빼먹으면 안 되는 것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는 전래동화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그림을 그렸다. 오~ 예전보다 확실히 실력이 늘어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미술학원을 한 번도 다녀보지 않은 아이가 언제까지 그림 대회에 출전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서 색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실패하더라도 계속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처음엔 자기가 좋아하는 보라색만 냅다 칠해댔다면 이제는 그리려는 대상의 특징에 맞는 색깔,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색깔을 선택한다. 단순히 칠하기보다는 고민해서 음영을 주기도 한다.


일 년에 많아야 다섯 장 그려서 출전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학부모 참관 수업일에 가서 보니 많은 도움이 된 것이 느껴졌다. 아이가 해바라기를 칠한 것을 보니 나름 많은 계산을 통해 칠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진지하게 본다는 것도 장점이 되었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렸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귀엽다.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성인 작가들의 생각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나. 그래도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렇다.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아이에게 생각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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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 대회의 취지와 심사 기준을 고민해 보는 훈련도 꽤 됐다는 것이다. 아이는 그림 대회에 입상하지 못하면 매우 억울해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이 그렇게 선택한 이유를 나와 곰곰이 따져보면서 재도전을 선언했다. 그리곤 엄마와 함께 그림 작전 회의를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고민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아이가 엄청나게 발전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림 대회 출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내년에 중단될지 아니면 꾸준히 발전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아이가 도전하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응원하고 열심히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작품을 보내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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