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바로 저였답니다.
알고리즘은 신기한 것이었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만 검색했는데도 인스타그램에 각종 수학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처음엔 참 좋았다. 아이에게 쉽게 수학을 가르쳐줄 수 있는 비법이 영상으로 소개됐으니 말이다. 오~ 꿀이득!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자 알고리즘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수준별 수학 문제집에 대한 정보를 내려받으려면 계정을 팔로우하고 댓글에 수학 좋아를 쓰세요!’
계정을 팔로우하고 댓글을 쓴 뒤, 자료를 받는다. 그다음엔 또 다른 계정이 나를 유혹한다. 새로운 계정을 팔로우하고 댓글을 쓴 뒤, 새로운 자료를 받는다. 그렇게 많은 자료를 내려받기하다가 어느 날 알았다. 내가 무조건 신뢰하고 팔로우를 맺었던 계정들이 전문적인 계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 나 그래도 박사 수료까지 한 여자인데, 이렇게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건가. 그렇다. 엄마들은 아이와 관련된 것 앞에서는 흐린 눈, 팔랑 귀, 손 덜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뒤로는 수많은 자료 다운의 유혹을 물리치고 내가 직접 문제집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의 수준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그에 맞는 문제집을 골랐다. 인스타그램 계정에 흔들릴 때는‘수해력이 중요하다, 연산은 이 문제집은 꼭 풀어야 한다, 최상위나 필즈는 이미 풀고 있어야 한다’ 등등의 카더라에 엄청나게 흔들거렸다. 그래서 언급되는 문제집을 일단 주문해서 책꽂이에 꽂아두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우리 아이는 만점왕 문제집도 겨우 풀고 있는데 내가 너무 안이했나 싶어서 초초하고 불안한 마음을 문제집 쇼핑으로 채웠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의문과 의심이 동시에 몰아닥쳤다.
‘이 많은 문제집을 초등학교 2학년이 소화해 낸다고?’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아이는 방과 후 수업을 하고 태권도,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집으로 오는데 그러면 오후 6시다) 숙제하고 책 한 권 읽고 구몬 연산, 만점왕 시리즈만 풀어도 밥 먹고 잘 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문제집을 모두 풀려면 도대체 몇 시에 잔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어진 문제를 모두 다 소화하는 아이는 수학에만 올인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봤던 아이큐 130 이상의 아이들인가? 그 아이들은 책에 파묻혀 공부해도 참 즐거워 보였는데……. 우리 딸은 확실히 그 아이들과는 달랐다. 우리 아이가 수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미친 듯이 밀어내어 수학의 정상에 올려 보내야 하나 싶었다.
더 걱정됐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문제집하고만 대화하면 진짜로 필요한 대화는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현관만 나가도 재밌는 것들이 천지인데 그걸 지나쳐서 종이에 쓰인 글을 해독하는 데만 시간을 쏟는다는 것이 아깝기 시작한 것이다.
수학만이 아니다. 내 전공과목인 국어나 한국사, 한자 등의 과목을 설명한 글들도 내가 볼 땐 엉뚱한 글이 많다. 한국사의 경우, 연표로 꽉꽉 채운 책이 많이 추천되는데, 그건 한국사 공부를 어느 정도 초벌한 상태에서 봐야하는 책이다. 국어도 그렇다. 독해를 바탕으로 핵심을 끄집어 내야하는데 그런 내용은 보이지 않고 여백의 미가 풍성한 문제집이 참으로 많이 추천된다. 한자는 말해 뭐하나. 인스타그램 계정들은 어찌나 책을 사라고 하는지 모른다. 그것도 전집으로 말이다! 공구 요청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시작했다는 멘트도 빠지지 않는다. 아이고, 공구!
나는 전집을 한 번에 사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은 그때그때 다양하게 골라 읽어야 아이가 흥미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전집을 집에 고이 모셔놓고 100권 완독 한다? 아이는 같은 패턴의 디자인과 글에 질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가 전집을 읽지 않는 것이냐? 아니다. 우리 아이도 전집을 읽는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전래동화책을 지금 읽고 있는데 일주일에 2권씩 빌려온다. 자기가 읽고 싶다고 생각되는 제목을 골라서 오기 때문에 만족도도 높다. 그리고는 그림책 2권, 친구들이 재밌다고 추천하는 책 2권 정도를 매주 빌려온다. 아이가 책을 대출해 오는 것에는 내가 관여하지 않는다. 가끔 그림책만 너무 많이 빌려오면 줄글이 많은 글도 빌려오라고 코치하는 정도다.
한 번은 아이가 태양왕 수바라는 책을 빌려온 적이 있다. 표지에는 수박이 그려져 있는 거 같은데 수바라니! 나부터 책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정말 많이 웃었다. 능글맞은 팥 할머니가 태양왕 수바를 어찌나 잘 다루시던지. 웃겨서 혼났다. 재밌는 책을 빌려와 줘서 고맙다고 하며 아이에게 이지은 작가의 책이 또 있으면 도서관에서 더 빌려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이는 자기 수준에 맞는 좋은 책을 고를 능력이 있다. 그러니, 필독도서를 꼭 읽어야 한다고 몰아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집 막내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뭇가지에 긴 실을 늘어트려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애벌레를 발견했다. 세 살 아이의 키에서는 공중부양한 애벌레가 보이지 않아서 번쩍 안아서 애벌레를 보여줬다. 애벌레는 늘어트린 실을 통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뱅글뱅글 돌며 엄청난 서커스를 보여주었다. 막내가 깔깔대며 애벌레 재밌어!라고 말한다. 이제 집에 갈까?라고 했더니 애벌레야 안녕~ 또 보자~라고 말한다. 27개월 아이가 애벌레를 통해서 여러 말을 뱉은 뒤, 하루가 흘러 그 장소를 지나갈 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엄마 우리 애벌레 봤지? 하고 말이다. 애벌레 무슨 색이었지?라고 물었더니 초록색이야~ 아가는 빨간색 노란색 좋아!라고 외친다. 그래, 이게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인데 초등학교 저학년이 됐다고 둘째를 너무 몰아댄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정신 차려야 할 때다. 아이에게 공부를 다르게 접근시키자!
그 뒤에는 학교 진도에 맞춰서 꼭 해야 하는 공부와 궁금해서 해보고 싶은 공부를 딸이 직접 고르게 했다. 학원도 그렇다. 지금은 예체능 위주이긴 하지만 이것을 유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딸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그렇게 선택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한국사와 과학을 엄마가 가르쳐줬으면 좋겠고 수영 수업을 추가하고 싶다고 했다. 방과 후 수업은 모든 수업을 들어 봤으니 생명과학과 컴퓨터 수업만 남기고 미술, 토탈공예, 방송 댄스는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진행시키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당탕 좌충우돌을 엄청나게 겪고 있다. 기본서 정도만 내가 가르쳐주면 될 줄 알았던 1학년 초, 독서습관과 책 읽는 방법도 알려줘야 했던 1학년 중반, 문제집에 맹신했던 1학년 후반까지 1년을 보냈다. 그렇게 2학년이 왔고 유명 SNS 계정을 통해 받아본 정보의 바닷속에서 허우적 댔다. 그렇게 한 학기를 발버둥 치다가 구명보트를 잡고 올라와 정신을 차린 것이 지금이다.
간신히 구명보트를 타고 구출됐지만 아직도 헤매는 것은 여전하다. 그렇더라도 하나 중요한 것! 이 모든 공부가 내 공부가 아니라 아이의 공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제대로 깨달았다. 지금은 공부를 무조건 잘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친해지는 시기라는 것,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