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직접 짜야 제 맛입니다.
방학이 오고 있나 보다. 1학기 수학 진도가 마무리되었다는 알림장이 왔으니 말이다. 달력을 보니 열흘가량만 더 있으면 여름방학이다. 한 달가량의 방학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하자마자 국영수사과의 학습 목표들만 두둥실 떠오른다. 내가 계획하는 것들을 모두 실행해 버리면 아침 9시부터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맙소사. 애를 공부 기계로 키울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1학년 방학 땐 뭘 했더라?
1학년 때의 여름방학은 겨울 방학 석면 공사 때문에 일주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휴일이었다. 그렇다면 기나긴 겨울 방학 때는 무얼 했었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질 않아 먼슬리 플래너를 펼쳐보았다.
일단, 아이의 이가 너무 썩어서 치과에서 수면 치료를 했고, 사랑의 하츄핑 뮤지컬을 보았다.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보려고 열심히 한자를 외워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구몬 수학 B단계를 열심히 풀었다. 끝. 겨울 방학은 두 달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바빠서 아이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와, 나 진짜 바쁘게 사냐고 정신이 나가 있었네?
사실, 아이는 돌봄 교실에 가고 있어서 방학에 느슨할 여유도 없다. 방학의 매력은 늦잠에 있는데 잠투정할 시간도 없는 것이다. 학기 중에는 교실로 등교를 했다면 방학에는 돌봄 교실에 간다. 그러니, 아무리 원대한 계획을 짜더라도 지켜질 리가 없다. 나와 마주 보고 무언가를 하려고 해 봤자,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치원 방학 때는 아이가 계획을 짜면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주려고 했다. 아이는 여러 가지를 적어놨는데 동두천에 있는 어린이박물관에 가서 클라이머존에 들어가기(키 120cm 이상 선착순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아이가 키크기 만을 기다렸었다), 롯데월드에 가서 하루 종일 놀기, 엄마 학교 앞에 있는 인도 요리 먹기 등이었다.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아이에게 여름방학 때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라고 했다. 계획을 다 짜면 실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눈 뒤에 최종 계획을 짜고 엄마랑 같이 해보자고도 말했다. 아이가 에이포 용지에 신나게 써댄다. 재밌게도 생각 없이 막 쓴 것 같은 계획은 의외로 균형 잡혀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오락실 가기, 에그박사 뮤지컬 보러 가기, 수영 특강 열심히 가기, 달팽이 먹어보기, 동생 없을 때 엄마랑 신나게 놀기, 영화 보기, 엄마랑 키즈카페 가기, 돌봄 교실 나가기, 한자 외우기, 구구단 외우기가 쓰여 있다.
오락실은 영화관에 있으니 한 번에 가면 되고, 키즈카페는 오빠와 동생도 가고 싶을 테니 같이 가도록 조정했다. 달팽이 요리는 왜 먹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먹고 싶은 것이 달팽이인지 소라인지 다슬기인지 같이 구분한 뒤에 먹어보자고 했다.
나는 아이가 놀고 싶은 것만 잔뜩 적어 놓을 줄 알았는데 구구단 외우기도 써놔서 놀랐다. 구구단 외우기를 5월 즈음부터 시도했었는데 잘 안 됐다. EBS 구구단 강의가 있길래 틀어줬는데 아이가 재밌게 외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나랑도 열심히 외웠는데도 2단과 5단에서 끝났다. 그런데 학교 수학 시간에 2단, 5단, 3단, 4단 ……. 순서대로 외우기 시작하니 재밌었나 보다. 갑자기 6단도 찾아보고 있다. 역시 공부는 학교에서 해야 하는 건가?
자려고 누웠는데 딸이 조용히 말한다. 선생님 앞에 가서 구구단을 외우면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주시는 미션이 시작됐는데 자기는 아직 도전을 못했다나. 스티커는 받고 싶지만 용기를 못 냈나 보다. 내일은 도전이라도 해보자고 누워서 열심히 2단과 5단을 외웠다. 틀려도 또 도전하면 되니까 힘내보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왔고 드디어 스티커를 하나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딸은 그렇게 나흘 연속으로 도전해서 스티커를 4개나 모았다. 오예~ 구구단이 쑥쑥 외워진다!! 아직 열흘가량 학기가 남아있어서 9단까지 진도가 나갈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방학 때 반복해서 읊고 거꾸로도 외우고 랜덤으로 퀴즈도 내주면 될 것 같다. 집에서 외울 땐 그렇게 안되던 구구단이 학교 선생님과 함께 하니 정말 잘된다. 역시 교육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맞다.
한자의 경우, 시험이 5주가량 남았는데 20자만 더 외우면 시험을 볼 수 있다. 하루에 2자씩 열흘 외우고 남은 3주 동안 까먹은 한자를 반복해서 외우고 예상 문제를 풀어보면 되니 시간은 충분하다. 이 정도만 해도 성공적인 방학을 보내지 않을까? 물론, 평소에도 했던 매일 했던 책 읽고 한 줄 독후감 쓰기 등은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공부를 오래 하다 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계획표를 너무 촘촘히 짜면 괴롭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구몬 수학을 매일매일 5장씩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파서 못 풀고, 하루는 숙제가 많아서 못 풀고, 하루는 가족 모임 때문에 못 풀 수 있다. 그렇게 하루 밀리면 다음 날엔 10장을 해야 한다. 숨이 턱 막힌다. 구몬은 밀려야 제맛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밀릴 때의 이야기다.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 계획을 짜놓고 시작부터 어긋나서 포기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의 계획표는 조금 느슨하게 잡고 있다. 국어나 수학 문제집의 경우, 매일 푸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바쁘면 못 풀 수도 있다. 한국사는 되도록 주 2회는 푼다. 혹시라도 미술 공모전 등에 작품을 보내고 싶으면 금요일 하교 후에 그림을 그린다. 다 못 그리면 주말에 보강한 후 월요일에 우체국에 가서 택배를 보낸다. 물론, 그림을 그려야 하니 금요일 공부는 쉰다. 이런 식으로 계획을 잡았더니 매일매일 못하더라도 학기 말이 되면 꾸준히 한 티가 났다.
우리의 여름방학 계획이 얼마나 지켜질지는 잘 모르겠다. 계곡에 가서 물놀이도 해야 하고, 병원 정기검진도 가야 하고 천문대 어린이 캠프도 가야 하고 나도 일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또 다른 것을 얻을 것이다. 계획을 못 지키는 것도 일단 스스로 경험해 봐야 후회,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체득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여름방학 계획은 더더욱 아이가 짜는 것이 맞다.
요즘 나는 산후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30분 정도 걸은 후에 반환점을 돌아선 뒤, 30분 정도 달리기를 한다. 살찌는 것은 쉬운데 빼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른다. 숨이 헐떡대고 위고비의 유혹이 밀려온다. 그럴 때면 달리기를 멈추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나를 채찍질하는 한 마디가 있다. 이거 조금 힘들어서 멈출 거면서 아이에게 구구단 외우라고 얘기할 자격이 되니? 정신이 번쩍 들어서 열심히 뛴다. 살을 빼기 위해서 저녁도 안 먹고 있는데 너무 배고파서 배달 앱을 켤 때마다 또 생각한다. 이것도 못 참으면서 아이한테는 힘들어도 꾸준히 하라고 했니? 이 멘트들은 묘한 마법을 불러일으키는데 덕분에 달리기도 완주하고 저녁도 안 먹어서 살이 잘 빠지고 있다.
아이의 계획표를 벽에 붙인 뒤, 나의 여름방학 계획도 점검해 봤다. 이 더위가 끝나갈 즈음에 아이도 나도 부쩍 성장해 있기를. 아이는 예쁘고 건강한 마음이 쑥쑥 자라고 나의 내장 지방은 쫙쫙 빠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