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력이 된다면 나가보는 것도 좋아요.
‘개근 거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체험학습을 한 번도 쓰지 않고 개근한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누가 개근하는지, 체험학습을 다녀왔는지 저학년 학생들은 관심도 없다. 그저 학교를 빠지고 받아쓰기를 안 하는 것이 부러울 뿐?!
우리 아이는 체험학습 신청을 많이 한 편에 속한다. 출석 인정 체험학습은 일 년에 총 20일가량 신청 가능한데 1학년 때는 16일, 2학년 때는 1학기에만 7일을 사용했다. 계획을 꼼꼼히 짜서 데리고 나가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신청할 때가 많았다.
올해 신청한 체험학습은 일본과 중국으로 여행을 간 것과 청와대 관람 때문이었다. 일본에 간 이유는 우리 부부의 결혼 10주년 기념일 때문이었는데 일본에 자주 가서 그런지 아이가 꼭 먹고 싶은 것과 가보고 싶은 곳이 명확했다. 중국은 내가 학술답사를 떠나게 됐는데 학술답사 마지막 날 아빠랑 와서 나를 만난 뒤, 내가 추가로 조사하는 동안 따라다닌다고 해서 허락해 줬다.
아이가 일본과 중국을 여러 번 다녀오면서 한자를 많이 봐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한자 공부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반 년을 공부했는데 이제는 외운 한자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됐다. 한자를 볼 때마다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데 한자씩 외우면서 그 비밀이 풀려서 정말 재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한자어를 많이 쓰면서도 한자어를 한글로 표현하기 때문에 한자를 접하기가 힘들다. 한글을 보고 한자를 유추해야 하니 아이들이 한자 공부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으니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아이를 해외로 데리고 다니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학습적인 면까지 끌어올려지는 장점이 있었다.
또 다른 장점은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는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고정관념과 편견이 별로 없는 상태이므로 무언가 불편해도 ‘아~ 그럴 수 있어 내가 해보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는 화변기가 그랬다. 쭈그려 앉아서 볼일을 보는 것에 적응하는 것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아이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내가 뒤에서 잡아줘야만 화변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다음번에 중국에 갔을 때는 큰일을 보고 싶은데도 잘 안 나와서 좌변기가 있는 숙소로 돌아가서 일을 봐야 했다. 그 뒤로 아이는 피아노 학원에 화변기 칸이 하나 있다면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혼자 화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중국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으니 어찌나 좋던지.
그 외에도 미리 조사해서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좋았다. 중국에 가기 전에 변검이라는 공연이 있다고 잠깐 보여줬는데 꽤나 검색을 많이 해봤나 보다. 중국에 가자마자 변검 공연을 보자고 노래를 불러서 데리고 갔다 왔다. 일본에서는 각종 캐릭터 샵이 아이를 사로잡았기에 포켓몬 센터, 산리오 갤러리는 이제 필수 코스다. 특히나 면을 좋아하는 딸은 우동, 소바, 라멘을 먹기 위해 열심히 검색한다. 지난번엔 소혀 카츠를 사줬는데 ‘음메~ 소의 혀를 먹는 거라고?’ 하면서도 쫄깃쫄깃하다며 신나게 먹었다. 여러 음식을 접하다 보니 거부감도 없다.
중국과 일본을 많이 다녀와서 동아시아에 대한 친근함이 생긴 것도 있지만 내 친구 중에 중국인 친구와 일본인 친구가 있어서 시너지가 생긴 점도 있다. 하루는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소포를 보내려고 포장하는데 딸이 같이 보내 달라며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왔다. 확인해 보니 파파고를 이용해서 중국어로 편지를 써왔다. 글을 썼다기보단 그린 수준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했다.
일본어도 그렇다. 신나게 교토를 돌아다닌 후, 숙소에 와서는 자기가 오늘 본 글자들을 써보겠다며 열심히 그려댔다. 그리곤 일본인 언니한테 잘 썼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친구들은 다정해서 그런지 아이가 연락하면 상냥하게 대해줬고, 치파오를 선물한다든지, 포켓몬 빵과 라면, 메모지 등을 잔뜩 챙겨서 주고는 했다. 덕분에 아이의 머릿속에 동아시아 지도가 들어가게 되었다.
나의 직업 때문에 아이가 이득을 보는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논문 때문에 조사하러 나가는 일도 많고 회사 일 때문에 나갈 때도 많은데 그때마다 엄마를 따라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점은 아이에게 엄청난 기회인 것이다. 또, 엄마의 자산 덕분에 외국인과 얘기하고 무언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당장 해외로 떠나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꼭 해외로 나갈 필요는 없다. 특히나 가이드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은 그리 효과가 좋지 않다고 얘기해드리고 싶다. 아이와 함께 편히 이동해 보려고 패키지여행을 갔다가 크게 후회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렇다. 관광은 정말로 추천하지 않는다.
해외도 해외지만 아이가 꼽는 베스트 여행이 있다. 일을 보러 갔다가 전주 한옥 마을에 가서 자고 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전주에 또 가고 싶다고 가끔가끔 이야기한다. 한옥이 정말 예쁘다나?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아이라서 그런지 한옥에서의 하루가 뇌리에 박혔나 보다. 마침 학교에서도 우리나라에 대해 배우면서 한옥마을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체험학습이 학교 수업까지 연계되니 아이가 좋아서 방방 뛰었다.
여수에 볼일이 있어서 간 적도 있는데 그때 먹은 엄청난 양의 음식과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잊지 못한다. 가끔 경포대에서 먹었던 생선구이도 얘기하는 걸 보니, 아이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행복한가 보다. 올해 하반기에는 경주와 제주도에 가기로 했는데 이것도 나의 일에 끼어서 따라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매우 좋아하며 경주와 제주 검색 삼매경이다. 부모와 함께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이 아이에겐 큰 경험이 되나 보다.
가까운 곳에 가는 것도 좋다. 며칠 전에 다녀온 청와대가 그렇다. 청와대 완전 개방이 곧 끝난다기에 표를 구해서 아이와 함께 갔었다. 청와대에 가면서 청와대는 어떤 곳인지 대통령은 무슨 일을 하는지 얘기해 줬더니 아이가 갑자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대통령이 돼서 뭘 하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가 1호 공약이고 2호 공약은 세계 여러 나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에게 이런 공약이 나올 수 있다니 데리고 간 보람이 있다.
가끔씩 아이를 볼 때마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아빠가 고학력자이고 비교적 전문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차원이 다른 경험이 아이에게 펼쳐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글을 올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당장 아이에게 무언가를 못 해주는 느낌이 드는 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를 분명히 해주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많은 체험을 하는 우리 아이에게도 결핍은 있다.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북적북적한 명절이 없고 외할머니가 바로 옆 단지에 살아서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기에 할머니 댁에 가는 낭만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할머니가 양평에 사셔서 시골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즐거웠는데 말이다. 그 외에도 가족들 때문에 오는 사회적 편견에 매일 맞서고 있으니, 쓰지 못한 결핍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이에게 체험학습은 자신을 성장시키면서도 삶에서 오는 결핍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배려다.
그러니, 체험학습에 너무 고민하지 마시길 바란다.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과 일해보면서 느낀 것은, 아이에게 잘 해주기만 한다고 좋은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어릴 때부터 해보았다는 이유로 자만심에 가득차 있는 사람도 보았고 반대로 많은 것을 못 해보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 모두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