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면접은 대학교 입학 면접 이었다.
점수도 모자라면서, 200명 중 단 3명을 뽑는 수시 면접에 지원한 상황이라
그렇지 않아도 '자신감 없음의 대명사'인 그때의 내가 잘했을 리가 없었다.
추운 2월 어느 날 어쩐지 차갑고 무섭게 느껴지던 E대의 회색 빛 복도에서 추위와 긴장감으로 덜덜 떨며
애써 의연한 척 했던 내 모습,
딱딱한 문을 열고 들어가 잠깐의 낯설음과 당혹감을 경험하고 나왔을 때의 얼떨떨함이
내 생애 최초의 면접에 대한 기억이다.어떤 말을 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사 첫 면접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기억이 생생하다는 건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만큼 좋은 기억이거나
그 반대일텐데 당연히 내게는 후자가 허락되었다.
내 첫 입사 면접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L사의 인턴 면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떻게 그렇게 천하태평이었는지 돌이켜봐도 황당한데,
취업을 눈앞에 둔 4학년의 내가 여름방학 때 한 거라곤
우리 과와 다른 과 몇 명이 함께 만든 SSAT 스터디에 주2회 참석한 것 뿐이었다.
함께 4학년을 보낸 친구와 분명 방학내내 만나긴 했는데 대체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건 아니고...
그때의 사진을 보면 제일 건강했고, 밝았고, 신났고, 즐거워 보이더군요.
'백수'라는 기약없는 무시무시한 자유가 있을지 모르고 마지막 방학이라며
자유를 만끽해야 한다며 더위도 잊은 채 매일 놀았던 기억뿐.
(누가보면 초등학교4학년 여름방학에 대한 회상인줄 알겠지만,
요즘 초등학교 4학년도 이렇게 놀지는 않는다는 것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무 생각없이 넣은 몇개의 인턴 지원 서 중
생각지도 못하게 L사 그룹사중 한 곳에서 서류 합격소식을 듣게 됐다.
내가 뭘 알았다면 L사에 지원하지도 못했을텐데 역시 뭘 모르니 경쟁률이 높은지 낮은지도 모르고
그냥 넣어버린건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류에 합격했고, 면접을 보러가게 됐다.
게다가 그냥 인턴도 아니고, 방학동안 인턴으로 근무한 후 추후 평가를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이 될 수도 있는, 그 당시 대기업에서 막 시작한 형태의 채용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합격을 한다면 취업이 최소 50%는 보장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인턴이었던 것.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갖고 내게 와준 L사의 첫 면접은 여러모로 내게 많은 것들을 남겼는데,
그 중 내게 제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어쩌면 내가 의외로 대기업에서 원하는 숨어있는 인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갖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넣은 대기업 인턴 공고에 덜컥 서류 합격을 하고,
연이어 대기업의 고유명사 중 하나인 S사의 인적성 검사에도 한 번에 합격하고 나니
나는 마치 대기업의 서류통과가 어쩌면 내게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버린거다.
다시 면접 이야기로 돌아가서,
면접을 보게 된 나는 가장 먼저
당장 입을 정장이 없어서 엄마와 함께 부랴부랴 정장 한 벌을 급하게 사고 미용실을 알아보았다.
오잉? 이게 끝?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다. 맞다.
나는 첫 면접을 위해 무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물론 정장은 정말 사야 했고, 지저분한 머리도 깔끔하게 하고 가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준비해야할 지 몰랐던 거다.
그 당시에는 주변에 면접을 본 지인들도 많지 않았고,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어쩐지 조금 민망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던 그때의 나는
어디서 흘려들은 이야기들을 주워 모아
마치 그것이 꼭 지켜야만 하는 것들인 것처럼 닥치는 대로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런데 설상가상, 나는 면접을 이틀 남기고 독한 여름감기에 걸렸다.
중요한 면접을 앞에 두고 감기가 걸리다니 이미 마음 속에서는 몇 번이고 면접을 피하고만 싶었다.
감기로 뒤덮여 너덜너덜해진 얼굴에 덕지덕지 파운데이션이란 걸 억지로 바르고,
목은 꽉 막힌 채 따갑고 무심한 콧물은 계속 흐르고 게다가 한여름의 태양은 뜨거워
어설픈 화장으로 덮은 얼굴위로 땀이 줄줄 흐르던
그 불편하고 불쾌하며 어지럽고 아프던 그때의 내 모습과 기분이
아직도 나를 이른 아침 머리를 하러 간 낯선 논현동 미용실 골목에 서있는 듯 느끼게 할 정도로 생생하다.
열과 콧물과 목아픔으로 퉁퉁 부은 얼굴에 서투른 화장을 덧입고,
맞지 않는 힐과 정장을 입은 채 비틀대며 미용실 앞에 도착해 드라이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준비한 자기소개를 필사적으로 외웠다.
가끔 보이는 거울 속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이미 하루에 사용할 모든 에너지를 끌어 써버린 나는 면접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지쳐있었다.
겨우 자리에 앉아 직원분들에게 면접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긴장과 초조함이 대기실을 휘감고 있고,
그 속에는 마치 수십 자루의 검정수성싸인펜이 꽂혀있는 듯,
하얀 셔츠에 검정 치마, 혹은 검정 바지를 입은 면접동지들이 앉아 있었다.
아 내가 정말 면접장에 왔구나. ‘여긴 어디지?’, ‘난 누구지?’ 하던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평소 수업시간에 조별발표를 하면 발표자를 하지 않기 위해 무조건 PPT를 맡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드 스타일인 나인데 이상했다. (떨렸어야 했다. 평소처럼…)
면접은 다대다 면접이었고,
내가 첫 면접에서 받은 역사적인 첫 첫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아직도 절대 잊을 수 없는,
“OOO씨, 3학년 때 성적이 너무 안좋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오잉?’ 난 당황했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걸 물어본다는 걸 알려준 면접관련 서적은, 족보는, 면접 후기들은.
계속 외우고 있던 자기소개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그런 질문을 받았으면 아주 태연하게 다른 대답을 했을 수도 있고,
같은 대답을 하더라도 조금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하게 넘길 수 있었을텐데
그때의 나는 1+1은 2.라고 대답하는것조차 버거웠기에,
면접관들의 질문에는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정말 그 질문이 궁금해서 내게 묻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몰랐기에,
그저 그 질문을 마주한 나는 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아. 제가 3학년때 성적이 안좋군요. 음... 제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전 왜 그때 성적이 안좋았던 걸까요?,
아 그런데 저는 원래부터 성적이 좋은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아!다행입니다. 기억이 났어요.
내 성적!맞아 3학년 때 최저학점이었죠.
알아요 알아! 알아냈어요! 제가 그때 왜 공부를 안했는지! 왜 성적이 안 좋았는지!'
(과거로 돌아가면 말해주고 싶다. 알아내지말지 그랬어...) ‘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3
2
1
“제가 3학년때 짝사랑하던 오빠가 있어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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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저렇게 말했냐구요 면접장에서? 네. 이것은 실화입니다.
그렇다. 정말 나는 저렇게 말했다.
이 대답은 예전 어떤 소개팅에서 상대방에게 나는 팔에 털이 많다고 말한 이후 내 인생 최악의 발언에 등극하고 말았...
내가 그 대답을 하자마자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참가자들의 당혹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명은 제쳤다는 약간의 신남과 설렘,
그리고 뭐 이런 애가 있냐는 듯한 황당함이 담겨 훅 터지는 웃음과 어깨 들썩임.
물론 그건 나와 마주보고 있는 면접관들의 황당한 표정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더 안궁금해 하셨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짝사랑에 대해 설명했고,
어느새 면접에 가면 꼭 한 명씩 있다는 이상한 면접자가 되어버렸다.
이미 수습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브레이크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더 과해졌다.
그 다음 내가 받은 질문은 지방 상영관들의 마케팅에 대한 문제였으나
여기서도 나는 황당하기 이를데없는 대답으로 면접관들을 놀라게 했다.
진짜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때는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니 실은,
나는 면접장에 들어서자마자 이 면접에서 내가 돋보일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같이 면접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능숙해보였고, 그들의 스펙을 듣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그래서...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튀어보자고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 후의 장면들은 빠르게 흐른다.
면접비로 받은 영화상품권이 든 빨간 봉투를 받아 들고 지하철을 타 동호대교를 건너며 한강을 바라보던 나. 어찌저찌 집으로 돌아와 감기에 휩싸인 몸을 철퍼덕.하고 침대에 누인 채,
허탈함에 몸을 웅크리고, 마음을 움츠리던 나.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은 지금까지도 침대커버의 까슬한 감촉과 함께 내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첫 면접을 호기롭게 망친 뒤,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취업이 두려워졌다.
'아. 나는 아무래도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데,
어쩐지 이런 부정적인 예감은 나를 비켜간 적이 없던 데...'하고...
나는 당연히 불합격했고,
그 이후로 지금 까지 L그룹에는 서류조차도도 합격한 적이 한번 도 없다.
한참 뒤에 당시의 L그룹은 기업들 중에서도 아주 보수적이고,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기본적인 회사에 대한 정보조차 모르던 나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오랫동안 나는 늘 첫 면접의 나를 비하하고 낮추고 조롱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마다 내가 앞장서서 나를 깎아내리고 혼내고 놀렸다.
내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나는 내가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그것이 장장 10년간 이어지는 수 백 번의 면접의 처음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안쓰러웠다.
이렇게 기나긴 여정이 될 줄 몰랐다.
취업이 더 두려워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금방 끝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때의 내가 가여워졌다.
내가 나를 응원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을 찌른다.
지금이라도 다시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내게,
내 자신을 너무 창피해하던 내게, ,
내 부족함을 마주한 것이 너무 두려워 막막한 맘을 내 자신에게조차 감추었던 그때의 내게-
그래도 처음 치고 잘했다고.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20분의 면접 시간 중, 네게 주어진 5분 남짓한 시간에 너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를 모두가 알기에는 어렵다고.
적어도 너는 그 순간을 피하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토닥여주고 싶다.
그러니 이 글은 자조적인 반성문이 아니라,
취준15주년을 맞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게-
그때의 내가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던 위로와 응원을
뒤늦게야 전해보는 한 장의 진심이라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