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겨울 오후 3시 즈음
나는
좁은 방 한 구석에 앉아 겨울 해를 등지고 앉은 엄마가 내게 화장을 해주던 장면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마 아주 오래오래 내가 나일때까지는 잊지 못하겠지
나는 늘 어디 아파? 오늘 많이 피곤해? 라는 소리를 듣는 초췌함의 대명사다.
화장을 정말 못했고, 지금도 못하는데, 심지어 잘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화장이었다.
왜,
아이섀도우를 눈두덩이에 슥슥 펴바르고,
cc나 bb크림을 콩알만큼 덜어 얼굴 전체에 발라준다음 쿠션이나 파운데이션을 얹어
도자기 피부를 만들 수 없는지,
아이라이너로 속눈썹을 틈틈이 메꿔 또렷해보이는 눈을 가질 수 없는지,
대체 왜! 왜! 화장을 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건지...
결국 나는 면접에 가기 전, 늘 엄마에게 화장을 부탁했다.
화장대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작은 서랍장 위에 놓인 많지 않은 화장품들 중에서
내게 어울릴 만한 것을 고르고 골라 얼굴을 토닥여주던 엄마의 손길.
그것은 엄마의 손으로 내 마음도 토닥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정성들여 화장을 해주었어도 그 시기의 나는 거의 자주 면접에 떨어졌다.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미안해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내겐, 단연코 엄마였다.
그리고, 가장 원망한 사람도 엄마였다.
나는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치열하게, 과감하게 매달렸어야 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있다.
나는 모든 걸 다 잊고 버리고 내 꿈만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을 동경했고,
그 감정은 종종 나를 덮쳐 한순간에 무기력과 자괴감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그때의 나는 꿈을 이룬 사람뿐만이 아니라,
꿈을 향해 무작정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을 가진 사람도 부러웠었다.
도전못할 상황은 없다는건 사실 그렇게 말처럼 당연하거나 쉬운건 아니다.
무모한 도전도 사치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분명 존재하니까.
그 상황을 온전히 껴안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러니 꿈이나 도전을 포기한 사람들이 모두 나약하거나 간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취업을 준비하던 때의 나는 무조건 취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지만,
월급 30만원인 일자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다.
나는 혼자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에게 도움이 되어야만한다는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었다.
월급30만원으로 엄마를 도울수는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너무 잘 알면서도 나는 화가 났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과 시간을 쏟으며 살고 싶었다. 그래보고 싶었다.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든 아니든 그렇게 도전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환경에 놓여 내가 하고 싶은 걸 도전하지도 못하는 걸까.
너무너무 원망스러웠다.
더 나아가 뭐 하나 또렷하게 잘하는 것이 없이 어정쩡한 내게도 화가 났다.
대기업 최종합격에서 떨어진 후 나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엄마의 기대로 인한 부담감 사이에서 방향을 잃었다.
무거웠다. 무서웠다.
돌아보면, 그때의 내게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짐작할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해본다.
엄마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내가 회사에 입사한 후였다.
첫 출근 전날 밤의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만하는 어려움,
지옥같이 느껴지던 출근길을 마주할 때 나는 엄마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성실한 주부였던 엄마는 급격히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마흔이 넘는 나이에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마흔의 나이에 맞이한 사회는 어땠을까.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처음 해보는 일들, 그보다 더 어려운 사회생활과 마주한 엄마는 당혹감과 상실감을 느꼈었겠지.
얼마나 큰 부담을, 고통을 견디며, 무겁고 뾰족한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우리를 길러냈는지.
그때의 난 전혀. 절대로. 알지 못했다. 엄마는 혼자였다.
그런 외롭고 무서운 사회로 나아가야하는 딸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며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가 얼굴을 예쁘게 낳아주지 않아서 면접에 떨어진 거라고,
엄마가 내게 가난을 주었기에 나는 억지로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있다고 못되게 내뱉던 딸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엄마와 나는 서로에 대한 무게로 자주 힘들고 매일 슬펐다.
그래도 나는 그때를 가끔 생각한다.
홈쇼핑에서 무이자 12개월 할부로 큰맘 먹고 산 메이크업 세트를 짜잔-하고 보여주던
엄마의 웃음 같은 것들이 종종 나를 스칠 때,
1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내 화장대 한 구석에 머무르고 있는 그 화장품들을 볼 때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슬프고 아픈 기억이어도 엄마와 내가 서로의 얼굴을 가깝게 마주보았던 그때를 잊고 싶지는 않다.
아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화장을 못하는 철부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