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안녕?!
잘 지내고 있지? 올해 3월, 새 학기 시작할 때쯤 너희를 생각을 하면서 처음 편지를 썼었는데 벌써 28번째 편지네. 첫 편지를 쓸 때 선생님은 창밖의 눈꽃을 보면서 겨울의 끝, 봄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슬금슬금 봄이 오는 듯하더니 여름은 잠깐 들러서 도장을 찍듯 하고 다시 가버렸어.
"나 여름. 왔다가 감"
이제 노르웨이 계절은 가을에 접어들었단다. 다음 주에는 10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질 것 같아.
선생님이 며칠 전에 신문 기사를 봤거든. 이맘 때면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고, 하지 않고 있는 '무너진 고3 교실'에 대한 글이었어.
입시에 필요한 생기부가 마무리된 후 고3 교실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원소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공간임이 분명해.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친구들은 11년 반 동안 쌓인 수고로움을 <무한한 나태함>으로 보상받으려 하고, 수능에 집중해야 하는 친구들은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기 아까운 시기, <공부의 절정기>에 놓이지.
'흐르는 물'과
'타오르는 불'처럼
섞여 있을
너희의 교실을 상상해 본다.
어떻게 지내고 있니?
입시 제도며, 학교가 너희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건 지금 당장 소용이 없을 거 같아.
당장 물이 되고, 불이 된 너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까?
오늘은 수시 전형으로 대입 전형을 마무리한 ‘물’들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야. 얘들아, 선생님이 학교 밖 세상에 나와보니까 세상은 너무 많은 실패와 너무 많은 도전이 있는 곳이더라.
예전 편지에서 선생님은 그동안 결과가 보장된, 안전한 도전만 해왔다고, 실패를 너무 많이 두려워했던 걸 반성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지금 선생님의 사회 나이는 어쩌면 5살도 안 되는 것 같아. 아직까지도 아장아장 걷고 있어. 넘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 두려워서 장애물이 있으면 심호흡만 하다가 멈추기도 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볼게.
어제의 일이야.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가 있었어. 노르웨이 공립학교에선 매 학기 학부모 회의도 하고 1:1 상담도 해. 1:1 상담을 할 때는 영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학부모 회의는 노르웨이어로 진행하거든. 영어 통역을 따로 요청할 수 있지만 그건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라서 선생님은 통역 없이 학부모 회의에 참석해. 노르웨이어로 진행되는 회의 내용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분위기와 자료를 보면서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어.
선생님들이 학사 일정을 안내하고 학부모들의 질의응답이 끝나면 학부모들끼리의 토론 시간이 시작돼. 가끔 선생님은 이 타이밍에서 도망치듯 나오기도 했어. 노르웨이어로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부담스러워서 말이야. 그런데 이번엔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대화에 끼어들려고 노력했어.
더듬더듬 말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겠니?? 한국에 있었으면 완전히 반대였을 상황인데 말이야. 선생님은 그렇게 두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어.
.... 최선을 다했지만 힘들었고, 때로는 부끄러웠고, 가끔은 뿌듯했어. 다양한 감정이 오르내렸단다.
지금 선생님이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좀 더 부지런히 노르웨이어나 영어를 익혔으면 어땠을까'하는 거야. 노르웨이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서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과 섞여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거든. 물론 당시에 노르웨이어나 영어 공부를 나름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았어.
이제 아이들이 학교에 다 가고 시간이 생겼는데 노르웨이 사람들과 섞여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정말 적은 거야. 선생님이 또 소심하고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어서 말이지.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어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나 '퍼스널 스페이스'가 넓은 사람들이야.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선 누구나 할 것 없이 도움을 주지만 보통의 경우 거리감을 유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아니 매우 좋아해!
출처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78618
노르웨이어를 잘한다면, 혹은 영어라도 잘한다면,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의 교집합으로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누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인과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겠어. 너무 아쉬워.
언어는 분명히 능력이야.
언어 능력은 때로 자존감이야.
내가 이 자리에 존재함을 증명하기도 해.
그래서 말인데, 얘들아. 너희에게 필요한 퍼스널 브랜딩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하고 싶지만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것만 해봐. 딱 두 가지만 권할게.
하나.
관심 있는 분야를 정해서 꾸준히 정보를 찾는 노력을 하면 좋겠어. 최소 일주일 동안은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료를 찾아보는 거야. 그리고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2주, 3주 동안 계속 그 분야에 대해서 더 찾아봐. 유튜브도 좋고, 책도 좋고,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도 좋아. 매일 한, 두 시간은 그렇게 보내면 좋겠어. 짧게라도 뭘 봤는지 수첩이나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을 남겨놓으면 더 좋아. (꾸준함과 열정 필요)
둘.
영어 공부를 귀와 입으로 하면 좋겠어. 언어는 능력이야. 한국어로 잘 말하고 잘 쓰는 건 기본이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훨씬 더 많을 거야. 한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하면 외국에서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해. '배웠는데 왜 못하는 거지?'
꼭 기억해. 대학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필요한 건 "의사소통 능력"이야. 너희의 지식과 생각이 있고, 그걸 잘 표현하는 능력은 AI가 대신해 줄 수 없어. 일단 영어는 지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연습을 할 수 있는 걸로 당장 시작해 봐. 관심 분야를 영어로 찾아보면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어. (꾸준함+열정 더 필요)
일단 초급자라면!? 선생님처럼 해봐. 선생님은 보통 아침마다 운동하면서 Cake 앱에 있는 '오늘의 회화'(내용은 네이버 회화랑 같음)를 듣고, 말하고 반복해. 운동하고 씻고 나와서 아침 준비하고 먹고 치울 때까지 계속 들으면서 듣고 따라 해. 아마 쉬운 문장인데 말하려고 하면 잘 안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냥 꾸준히 매일 하다 보면 인증하는 재미도 있고 귀도 입도 열릴 거야.
학생도 직업이다
선생님이 "학생도 직업'이다. 학생은 공부하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니까 학생들에게도 주간 노동 시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하니? 너희는 아직 학생이니까 학교에 있는 시간 중에서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학생으로서 밥값을 하면서 지내면 좋겠다. 동의!? 마지막으로 '흐르는 물'과 '타오르는 불'로 지내고 있는 너희에게 시 한 편 남길게.
소금 시 / 윤성학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내기 위해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쓸데없는 곳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는 방향으로 너희의 소금기를 쓰기 바란다. 다시는 오지 않을 너희의 10대, 너희의 오늘을 응원해. 힘내라!
- 노르웨이에서 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