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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하 Norway Mar 17. 2023

에지를 주는 법

얘들아, 안녕?


잘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조용한 카톡방만 들여다본다. 선뜻 안부가 물어봐지지 않는 건, 선생님의 MBTI가 일단 기본적으로 I 성향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지난 1년간 100% 타의로만 만나게 된 사이였으며 이제 그 관계가 종료되었기에 연락하기가 좀 조심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해.  

학교가 맺어준 계. 약. 관. 계.

담임과 학생


너무 과한 표현이었나? 그렇지?
 이건 좀 아니다. 그럼 다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는 어마어마한 인연으로 만난 사이지. 한 해 동안 정말 잘 지내주었던 너희를 생각하니 기분이 흐뭇하구나. 






세상이 다 하얀색인 걸 본 적이 있니? 선생님은 자라면서 눈을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너희도 비슷할 거야. 하지만 지금 선생님이 살고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는 3월까지 때로는 그 이후로도 눈을 볼 수 있고, 스키도 탈 수 있어.


오랜만에 눈도 내린 터라 저녁을 후다닥 먹고 가족들과 야간 스키를 타러 갔어. 집에서 10분 거리에 스키장이 3개나 있는데, 좀 더 긴 슬로프를 즐기기 위해서 30분이나 달려서 꽤 큰 스키장에 도착했어. 산을 넘어 넘어 리프트를 탈 수 있는 곳이야.
 

노르웨이 야간 스키장


그런데 선생님이 작년에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선생님의 아이들과 남편은 스키를 열심히 탔나 봐. 레드나 블랙 코스를 타더라. 스키장의 슬로프는 일반적으로 초보자용(그린), 초중급자용(블루), 중급자용(레드), 상급자용(블랙)으로 구분되는데 색깔이 진할수록 경사도가 높고 난이도가 어렵잖아. 선생님의 수준은 아직 풋풋한 그린이고 가끔은 블루도 괜찮은 거 같아. 그런데 어제는 블랙을 내려왔지. 어떻게 됐을까?


정답은? '처참했다'

 

블랙 코스를 내려오다가 중간에 스키가 벗겨졌어. 넘어진 곳이 급경사 바로 아래쪽이라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앉아 있는 선생님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더라. 부딪히면 심하게 다치니까 일단 급하게 가장자리로 피했어. 그런데 하필 그쪽은 눈이 얼어 있어서 스키를 다시 신기도 나머지 한쪽을 벗기도 힘들더라고. 주저앉아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해보려고 애를 썼어.


'스키를 벗고 이 경사를 걸어 내려가야 하나'
'스키 센터에 구해달라고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지나가는 수준급 스키어(Skier)들이 괜찮냐며 연신 질문을 던졌어. 노르웨이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걸 망설이지 않는 편이거든.


"I'm OK. 아임 오케이. Det går bra. 데고 브라. (괜찮아요.)"  


다친 것도 아니고 일단은 부끄러우니까 되는 대로 대답하고 수습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최고의 실력자들은 초보를 알아보는 것 같아. 한 아주머니가 선생님을 보더니 아주 적극적으로 스키를 신겨 주겠다는 거야. 거절할 찰나도 주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때 선생님은 땀을 흘리 있었고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을 거야.  


"한쪽 스키는 에지를 주세요. 그리고 다른 쪽 스키를 신으면서 내 팔을 잡아요."


'아! 그놈의 에지. 그래 에지를 잡아야지!' 스키 초보와 실력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에지를 잘 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있거든. 스키 에지가 눈에 박힐 때까지 압력을 줘야 방향과 속도를 제어할 수 있지. 그런데 그걸 모르는 게 아니잖아? 알지만 못하는 거라고요.


너희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많잖아. 그렇지. (잔소리 아님)


블랙 코스에서의 시간은 선생님을 아주 외롭고 힘들게 만들었어. 그린이나 블루에서는 나름 에지를 잘 써가며 찰나의 스릴을 즐겼는데, 그런 기쁨은 알알이 바람에 흩어지고, 남는 건 실력자들이 스키를 타며 내려갈 때 선생님 얼굴에 뿌려대는 눈바람뿐이었어. 다시 그린 코스로 가서 '에지 주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아.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배울 게 없거나, 배울 게 있어도 거부하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거부하려고 해도 배워야 할 것이 (자의보다) 타의로 더 많이 생기는 거 같아. 그리고 살아가는 그 모든 배움은 말이야, 필연적으로 정체기 또는 좌절이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것 같아.


조지 제러드가 지은 <마스터리 - 단단한 마음, 지속하는 힘, 끝까지 가는 저력>라는 책에서는 마스터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거기에는 좌절이나 지루함은 당연한 것이기게 묵묵히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고 하더라.

"너희도 어떤 분야든 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 있을 거야."

마스터가 되는 과정을 밟으려면 일단 좋은 스승을 찾아야 하고, 계속 도전하고 피드백을 받아야 해. 좌절이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자기 의지를 계속 유지해야 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에지가 있어야 해. 여기서 에지는 자신만의 장점과 특성이면서, 독창성과 혁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돼.


스승 + 반복 + 피드백 + 자기 의지

그리고 "나만의 에지"가 필요하다!


선생님은 지금 순간에 하는 일이 선생님의 에지야. 스키 슬로프 위에서는 에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없지만, 슬로프에서의 경험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 글을 쓰는 것. 그게 선생님이 가진 에지야.


에지 점검 시간


주말에 스키장에 갔더니 스키 대회가 있어서 사진을 찍어 봤어. 선수들도 스키를 타기 전에는 에지를 정비해서 각도와 날카로운 정도를 확인하더라. 너희가 학교를 다니는 지금 이 시간은 성인이 되어 스키를 잘 타기 위해 에지를 준비하는 시간이야. 그러니 틈날 때마다 생각하렴. 


"너의 에지는 뭐니? 에지가 준비되면 기다릴 필요는 없어, 당장 스키를 즐겨!"


- 노르웨이에서 선생님이

* E
dge의 표준어는 '엣지'가 아니라 '에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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