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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seng Oct 19. 2022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은 없다.

1일 차,  포르투 

한 차례 경유를 포함한 20시간의 비행은 길고, 8시간의 시차는 크며, 9일의 여행기간은 짧았다. 체력과 시간을 아껴야 했다.


첫 아침, 포르투. 2022/10/01


여행 내내, 입장 대기줄이 긴 관광지는 피했다. 페냐 성,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타워는 내부를 방문하지 않았다. 신트라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무어인의 성, 유럽의 서쪽 끝이라는 호카 곶은 아예 가보지도 않았다.


구시가지, 포르투. 2022/10/01


짧은 일정에도 시간을 내어 방문했지만, 신트라나 코스타 노바, 아베이로 등은 다음으로 미뤄도 됐을 법도 했다. 대신 라고스의 해안선, 포르투의 강변, 리스본의 밤거리를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유명하다는 곳을 건너뛰고 또 건너뛰어도 포르투갈은 즐길 거리가 많다. 추천받은 식당을 못 갔어도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다.


식당 야외 테이블, 포르투. 2022/10/01


순서도 중요치는 않다. 동선 상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방법이 있을 뿐, 리스본을 먼저 보느냐 포르투를 먼저 보느냐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리스본을 먼저 보면 포르투에 감흥이 덜할 수 있다지만, 대신 체력이 넉넉할 때 넓은 리스본을 누린 후 포르투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반대로 포르투 일정이 먼저라면, 소담한 포르투와 웅장한 리스본의 대비를 느껴볼 수 있다.


이른 아침 렐루 서점, 포르투. 2022/10/01


비교적 한가한 아침의 포르투지만,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 있다. 렐루 서점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그려진 움직이는 계단의 영감이 되었다는 오묘한 곡선의 계단으로 유명하다. 서점 앞에는 개점 시간인 9시 30분에 한참 앞서서 긴 줄이 늘어선다.


렐루 서점의 나선형 계단, 포르투, 2022/10/01


인접한 차도로는 관광버스가 미어져 들어오고, 비슷비슷한 옷차림의 관광객이 무한 리필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노인인 것을 보며 해리포터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맞긴 하구나 하다가도, 이 많은 인파가 설마 다 해리포터 팬은 아니겠지. 아마도 손주를 위한 사진을 남기는 이들도 많으려니 싶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이 서점은 어디보다도 더없이 훌륭한 여행지일 법도 했다.


게티 이미지가 아니다, 포르투. 2022/10/01


물론 렐루 서점 역시 꼭 가봐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 이 거리를 벗어나, 쇼핑거리로 향하는 비탈길에도  포르투의 매력이 숨어있다. 유현준 교수가 아름다운 도시는 형태는 다르지만 재료는 통일되었을 때라고 ("현대 도시는 왜 아름답지 않은가" ) 말했는데, 포르투의 골목골목이 딱 그리하여 아름답다. 하지만 포르투 어디에나 아름다운 거리는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역시나 꼭 하나를 골라 반드시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이른 아침 비탈길에서, 포르투. 2022/10/01


여행자들 사이에서 포르투와 리스본은 비탈길이 많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숙소를 언덕에는 잡았다간 고생을 하니, 가급적 평지로 알아보라는 조언도 많았다. 실제로, 대개의 유럽 도시와는 다르게 시내 중심가의 상당 면적이 비탈길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으레 여행이라면 걸음 수가 늘어나는 게 당연하지만, 여행기간 동안 저녁이 되면 발과 다리가 붓기도 했다.


숙소 현관문을 열면, 포르투. 2022/10/01


하지만, 포르투갈은 이 비탈 덕에 여느 유럽 도시와는 조금 다른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빈, 파리 같은 거대 유럽 수도와는 다르게, 도시가 비대칭적으로 구획된 구간이 많다. 단조롭지가 않다. 언덕에 올라 비탈을 내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낮은 붉은 지붕 숲에서 유럽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서, 포르투. 2022/10/01


반대로 길을 올려다보자면, 언덕 너머서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질 사건이 예상되지 않는 즐거움도 있다. 또 이 길에선, 청청한 하늘과 어두운 도로와 좌우측의 다채로운 건물벽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실점을 즐길 수도 있다.


언덕 위에서, 포르투. 2022/10/01


무엇보다, 부산에서 태어나 성남에서 살고 있는 내게 이 정도는 그깟 언덕일 뿐이었다. 그러니 비탈길은 피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딸린 짐이 없고 다리만 튼튼하다면 이곳에선 꼭 가야만 할 곳도, 반드시 가지 말아야 할 곳도 없다.


공사가 한창인 구도심, 포르투, 2022/10/01


10일간의 포르투갈 여행을 이런 호흡으로 채우다 보니, 여행 막바지에 만난 영국인 부부는 우리의 여행을 조금은 아쉬운 듯 바라보기도 했다. 포르투갈을 자주 찾았을 그들에게는 물론 그렇기도 할 법하다. 수도원 회랑이 얼마나 고풍스러운지, 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번 여행 끝에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겉핥기 식으로 본 것이라 해도 좋다. 어차피 이 큰 수박을 어차피 그 짧은 기간에 다 먹어볼 수 없다.


동루이스 다리 아래에서, 포르투. 2022/10/01


대신 꼭 하면 좋을 것이 있다. 필름 카메라로 차분한 포르투 구시가를 낭만적으로 담아두는 것이다. 30년간 고향집에 묵혀있던 카메라를 챙겨간 보람이 있다. 쨍한 원색의 옷을 입으면 모델이 더욱 부각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꺼내볼 때마다 아내에게 칭찬받는 로맨티시스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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