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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Jun 20. 2022

응답하라 1980s 그 시절 시장 구경

    어린 시절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더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라는 말도 무색한 동네였다. 가장 높은 건물이 아랫동네에 막 지은 5층 아파트였으니 말이다. 나는 단독 주택들이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주택가에서 살았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고, 밥 짓는 냄새, 국 끓이는 냄새가 담을 타고 넘어오는 동네였다. 자동차도 많지 않았던 80년대. 골목에는 오토바이 몇 대가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포장도 되지 않아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텅 빈 골목은 우리 세상이었다. 친구들과 집집마다 내놓은 연탄재를 발로 차 깨트리며 놀거나, 공터 곳곳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자재들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다.


  편의점도 마트도 없던 시절 골목 어귀의 구멍가게에서 팔지 않는 것들은 시장에 나가야만 살 수 있었다. 슈퍼에서도 콩나물이나 두부 같은 것을 살 수 있었지만 시장보다 비싸서 엄마는 먼 길임에도 반찬거리를 사러 꼭 시장에 가셨다. 나는 시장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찬 가게가 보인다. 반찬 가게 아주머니는 나랑 내 동생이 귀엽다며 우리가 지나가면 꼭 불러서 콩자반을 한 입가득 넣어 주셨다. 달콤 짭조름한 콩자반을 우물거리며 본격적인 시장 구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거나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이가 아니었으므로 엄마가 시장을 보는 동안 다른 가게들을 구경했다.




  특히 내 눈 길을 끌었던 것은 정육점 앞에 놓인 빨간 소피였다. 소피는 양동이에 한가득 담겨있었고, 아저씨는 고기를 사가는 단골손님에게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소피를 한 그릇씩 푹푹 퍼주었다.(그게 '선지'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 알게 되었다) 물처럼 흐르지도 않는데 푸딩처럼 야들야들 흔들리는 덩어리가 너무나 신기했다.(사실 그때 푸딩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지만) 다음으로 재밌는 것은 아저씨의 칼질이었다. 아저씨는 춤을 추듯 리듬을 타며 고기를 썰었다. 아저씨의 야무진 칼질과 약간씩 흔들리는 몸짓은 한 번만 보기는 아쉬웠다.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몇 번은 더 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 날 아저씨는 본인만큼이나 다음 손님을 기다리고 서있는 나를 부르셨다. 그러더니 소피를 한 숟가락 듬뿍 퍼주셨다. 숟가락으로 퍼주신 걸 보니 먹으라고 주신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대체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어 멈칫했다. 수십 번 구경했지만 막상 먹으려니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아저씨를 믿고 용기 내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뿔싸. '이게 뭐지? 콩자반만큼 맛있는데!' 입가까지 빨개진 채 엄마한테 달려가서 "엄마 아저씨가 빨간 거 주셨어!"외치는 일곱 살의 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어렸을 때는 시장에서 소피도 퍼먹던 애였는데 커서는 고기를 안 먹는다고. 엄마, 아시잖아요. 사람 입맛은 변하는 거라고요.



  다음 코너는 생선 가게다. 하지만 생선 가게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들러야 한다. 얼음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생선들이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거기다 입이라도 벌리고 있는 생선과 눈이 마주치면 몸서리가 쳐졌다. 보는 듯 안 보는 듯 뚤레뚤레 지나가는 나를 보면 아주머니가 말린 새우나 쥐포를 하나씩 쥐어 주셨다. 그럼 나는 또 그걸 오물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엄마는 정육점은 안 들러도 생선가게는 꼭 들러서 고등어를 서너 마리씩 샀다. 툭툭 생선을 손질하는 망설임 없는 칼질은 사실 지금도 익숙하지 않지만 어린 나에게는 안 보고 넘어가기는 아쉬운 볼거리였다. 반으로 갈라진 고등어 위로 촥촥 뿌려지는 굵은소금은 쇼의 마무리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좋아하는 생선은 고등어가 아니라 갈치다. 야들야들 부드럽고 하얀 갈치 살은 언제나 먹고 싶은 반찬이다. 살이 어찌나 고소하고 부드러운지 늘 엄마가 갈치를 사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매번 고등어를 샀다. 갈치가 밥상에 올라오는 날에는 엄마가 갈치 살을 바르는 것을 보는 게 또 재밌었다. 엄마는 항상 가운데 뼈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 가운데 큰 살을 떼어내 내 밥 위에 가장 먼저 얹어주었다. 그러고는 양쪽 가에 뼈를 발라내고 거기 붙은 살을 엄마가 먹었다. 지금에야 안다. 갈치는 고등어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싸고, 냉동되지 않은 갈치 살이 부드럽고, 부모의 사랑은 가장 먼저 바르는 큼직한 생선살로 증명된다는 것을.



 시장 구경의 하이라이트는 방앗간이다. 가게 밖으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뿜어 나오는 게 꼭 무대 위로 깔리는 드라이아이스처럼 포스가 작렬이다. 갓 짜낸 참기름 들기름의 구수한 냄새는 방앗간이 시장의 주인공임을 입증해준다. 가게 안에는 신기한 기계들이 나란히 놓여 쉴 틈 없이 돌아간다. 기계들이 작동하는 소리 사이사이, 아저씨가 방망이처럼 커다란 주걱으로 기계를 탕탕 치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방앗간 앞에서는 목소리를 한껏 높여 대화해야 한다. 젊은 나의 엄마는 알뜰하고 손도 야물어서 어지간한 음식은 직접 다 해서 먹었다.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김장을 직접 하고, 고추장도 직접 담가서 먹는 분이시니 그 부지런함과 알뜰함은 말해 무엇할까.(우리 엄마는 내 마음속 대한민국 1등 살림꾼!)


  나는 엄마랑 방앗간에 가는 날이 제일 좋았다. 기계가 돌아가는 것도 실컷 볼 수 있고 아주머니가 먹을 수 있게 허락해주시는 특별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린 찹쌀이나 불린 맵쌀이 기계에 몇 번 들어가면 납작한 가루가 되어 나오는데 아줌마랑 아저씨는 소금을 살짝 뿌린 이 가루를 내가 집어 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쌀가루가 쌀맛이었을 건데 갓 빻아나 온 쌀가루는 왜 그렇게 맛있는지 나는 그걸 집어먹으러 방앗간 갈 때 꼭 따라나섰다.


  뭐니 뭐니 해도 방앗간의 하이라이트는 떡이다.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잘 보이지도 않는 하얀 수증기를 헤치고 찜기에서 시루떡이랑 백설기를 척척 꺼내셨다. 떡이 기계로 뽑혀 나오는 것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가래떡이랑 절편은 나오는 동시에 찬 물에 담갔다 뚝뚝 잘라 참기름 샤워를 시켰다. 아주머니가 끊는 가래떡은 희한하게 길이가 딱딱 맞았다. 거기서 조금 남으면 옆에 있는 나한테 떼어 주셨다. 절편 찍는 것도 정말 신기했는데 기다란 나무에 떡을 찍으면 꽃무늬 비슷한 알 수 없는 문양이 찍혀 나왔다. 정말이지 방앗간은 쩔었다.(요즘 사람들이 유튜브로 음식 만드는 영상을 시청하는 이유를 그 시절에 깨우친 게 분명하다)  

 



  요즘 아이들은 시장에 갈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만해도 주차도 힘들고 가격이 일정하지 않은 오일장 대신 대형 마트에서 장 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일이 있어 들르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늘 물에 젖어있던 좁은 길이나 생선 비린내,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거대한 족발. 생닭 집의 커다란 통나무 도마 위에 무시무시하게 꽂혀 있던 큰 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불 가게에 진동하던 새 이불 냄새와 가구점 특유의 냄새도 기억난다.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지루하면 시장 끝 내 친구 시온이네 가구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엄마가 나를 찾으러 가게로 들어왔다. 엄마가 장을 보는 동안 온 시장 사람들이 함께 아이를 돌봐주었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고 취향에 맞추어 맛있는 것을 입에 넣어주었던 정이 그립다.


  우리 지역에는 여전히 오일장이 선다. 다음 장이 서는 주말에는 아이들과 시장 구경 가봐야지. '엄마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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