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만으로 세 살쯤 되어가는 딸아이를 보며 문득, 그리고 가끔씩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까지 새엄마를 친엄마라고 생각하고 컸지만 그녀가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나 혹은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와 싫은데 억지로 키우고 있다는 생각은 종종 했다.
동네에 요구르트 아줌마가 올 때 나는 종종 이유 없이 요구르트를 얻어먹지 못했고 계절이 바뀌어 시장에서 새 옷을 몇 벌 사게 될 때 옷에는 관심 없는 남동생에 비해 드레스와 예쁜 옷에 관심 많은 나는 뒤쳐두고 동생이 더 많은 옷을 얻어 가지고 집에 올 때, 저녁상에 치킨이나 돈가스가 올라오면 동생보다 더 고기를 늦게 밥 위에 얹혀 먹게 될 때, 집에 놀러 온 동네 아줌마들에게 그 작은 아이였던 나를 두고 마치 남의 집 아이인 것 마냥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들었을 때, 목욕탕에 갔을 때 아빠 몰래 늘 술을 마시고 취기에 내 살이 벗겨질 것 마냥 고문하듯 내 온몸의 때를 매주마다 밀 때.
무엇이 정상인지 모르는 상태의 어린아이였던 당시의 나에겐 동네 친구나 학교, 학원 친구들, 주로 여자 아이들의 엄마와 딸의 다정하고 계단이 없는 관계를 볼 때마다 엄마라는 그녀와 나의 관계는 의심쩍었다.
사업에 망한 아빠가 본격적으로 매일 술을 마시고 폭행을 일삼자 '미안하다'라는 네 글자를 남긴 쪽지와 밥 한 솥, 국 한 솥을 남겨두고 간 새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적이긴 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아빠의 장례식에 스무 살도 많은 나이 많은 택시 기사 남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아빠의 장례식 후 내 동생을 자신이 낳았으니 데리고 가 키우겠다고 나를 앞에 두고 할머니에게 얘기할 때부터 그녀를 다시는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술주정뱅이 아빠를 두고 가출한 그녀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아빠와 비슷한 상태로 술로 인해 건강을 망치고 요양원에 계신다.
십 대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고 이십 대를 시작했다. 작가가 되겠다고 작가 연수원을 다니고 공모전마다 출품을 하며 KBS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중 '친엄마'를 만났다.
스무 살에 만난 내 친엄마는 이방인이었지만 그간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가 보지 못한 나의 완전한 얼굴을 퍼즐 맞추듯 맞춰 보는 느낌이었고 "내가 죽으면 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라고 얘기한 할머니의 조언을 따라 그녀를 만난 것이, 그래도 엄마니 늦게라도 만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와 살던 경기도 성남에서 엄마가 살던 부천으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이사를 했고 엄마가 있는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그녀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다 결혼을 해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남편과 아들은 엄마의 과거, 결혼 사실, 나라는 자식이 있단 사실을 알리지 않고 결혼해 2006년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남편에게 가까이 이사와 살고 있는 딸이란 나란 사람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게다가 엄마의 가족 전부가 엄마의 과거를 묻는 현실에 동조하고 있었기에 나는 아빠가 다른 엄마의 아들을 만나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겐 매일 업데이트를 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할머니에게도 맘껏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 엄마의 일인데 엄마의 치부를 까 할머니에게 얘기해 봤자 할머니의 걱정만 늘 뿐이라 생각해 엄마의 그림자 같은 딸이 되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분명히 친구보단 더 한 사이임이 분명한 '남자''친구'도 나에게 소개해 주고 기러기 아빠라는 그 친구에게 내가 살던 아파트 앞 집에 집을 구해 들여앉혀 나를 감시하게 했고, 남편 앞에서는 피우지 않는다는 담배를 내 집에 아예 들여놓고 피우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 때는 걸리지 않던 신경성 장염에 걸려 병원에서 약을 타 먹고 나와 있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고객이랑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엄마를 보고 내 결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나도 모순이 많았지만 스무 살이나 되어 만난 나를 낳아준 엄마를 보고선 나의 모순이 어디서 왔는가를 내 두 눈으로 가감 없이 보고 나서야 그곳에, 엄마가 있는 곳에 엄마의 그림자로 살고 싶진 않단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되돌아가기엔 이젠 아빠가 돌아가셨던 열 살의 작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럴 경우엔 한국에 있고 싶지도 않단 생각이 들어 영화 공부가 하고 싶어 모아둔 몇 백만 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시기, 엄마는 한국의 어느 대학 교수님으로 지내는 자신의 남동생이 십여 년간 유학생활을 한 필리핀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구차한 설명 없이 한 두 달 이내로 준비를 마쳐 도망가듯 한국을 떠나던 날이, 인천공항에서 필리핀 항공기를 타고 한국을 떠나던 스물두 살의 여름 어느 날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가 언급하기 전까진 알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필리핀이란 나라에서 영어 테스트를 치고 두 달도 안 되는 단시간 안에 대학까지 입학해 적응해 나가는 필리핀 생활 서 넉 달 되던 시기 처음으로 엄마는 나에게 보낸 메일에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한단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한 달에 오육십만 원 내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박업소에서 나와 필리핀인들이 사는 약간 판자촌 비슷한 지역에 싸게 혼자 살 수 있는 집에 들어가 살겠다고 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난 뒤였다.
그냥 사는 대서 살아라, 할 수도 있었고, 자신이 돈이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엄마는 자신을 만난 걸 뭐 복권 걸린 것 마냥 생각하는 애 아니냐며 한국의 내 가족들에게 내 흉을 봤다고 할머니가 전화기 너머로 말해왔다. 그럴 거면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애를 외국까지 보내 놓고 지금 와서 이러느냐고 성질이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할머니가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나에게 괜찮다고 위안을 보내왔고 난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아빠에게 맞았던 기억던 순간들도 고통스러웠지만, 나라는 존재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낳아주었단 이유 하나 만으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으면서 나를 결론 내리는 나의 엄마가 성인이 된 나에게 준 고통은 더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 후 엄마와 화해를 했고 비슷한 일로 몇 달 후 또 연락을 끊었다. 아니 엄마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내 이메일 주소를 차단시켜 버리며 이야기했다.
'널 만난 걸 후회해. 안 만났던 걸로 하고 살자. 할머니한테 돌아가.'
연애를 했던 남자들도 나에게 그렇게 이별을 통보하진 않았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나에게 날 만난 걸 후회한다니.
2009년, 캐나다 생활 삼 사 년 차, 큰 아들을 낳았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와 연락을 다시 시작한 이유는 아이를 낳고 보니 그리고 키우다 보니, 나 스스로 엄마가 되어 보니 '나의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싶었고 그리고 어차피 캐나다에서 사는 거, 한국에 있지도 않은데 엄마의 남편, 아들을 보거나 눈치 볼 일도 없겠다 싶어서였다.
페이스북 메신저나 카카오톡이 있기 전, 네이트 온으로 채팅을 하던 시절인데 어느 날 내가 엄마에게 보낸 쪽지를 우연히 발견한 엄마의 아들이 엄마에게 나의 존재를 묻자 엄마는 '외국에 사는 친한 친구 딸'이라고 설명을 했다고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해 왔고 한 살도 안 된 큰 아들을 품에 안고 엄마가 된 나는 처음으로 엄마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왔다.
엄마는 어떤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런 그녀로부터 나온 나라는 사람은, 나의 과거 어느 한 부분이 아주 더럽고 힘들더라도,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의 존재 자체를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숨기거나 부정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엄마가 선택한 삶, 편안하게 잘 사시라고 메시지를 남기고 그렇게 엄마와의 연락을 두절한 게 만 스물다섯, 여섯.
캐나다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간 한국 여행에 자식들을 데리고 돌아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선택한 나의 엄마야. 알지?"
할머네가 내 손을 잡고 우셨다. "그렇게 얘기해 주니 고맙다 민지야. 알지, 니가 내 딸인 거 알지."
2023년, 내 나이 마흔, 이제 곧 만 세 살이 되는 셋째 아이인 막내딸아이는 내가 어릴 적 갖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지녔다. 무엇보다 내 딸에게는 엄마가, 아빠가, 든든한 두 오빠가 있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가정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선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내 자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부모가 된 것에 대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주 전 페이스북에 친구 초대가 들어와 보니 '나의 엄마'다.
내 페이스북을 얼마나 들여다보다 초대를 남겼을까 싶다.
어떻게 할까, 남편에게 마치 남의 일인 것 마냥 얘기를 하니 그런다.
"다음에 한국 가면 너네 엄마 어디 사는지 수소문해서 애들 다 데리고 그 남편, 아들 앞에 나타나 다 까발려버리자. "
신청을 받아 놓고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녀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들어볼 수도 있고, 초대를 수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을 며칠 일어나지도 않은 것 마냥 두다 인터넷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I respect the hell out of anyone who lives their truth, '
난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거침없게 살아내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해.
딸로서 나는 엄마에게 충분하고 넘친 기회를 주었고 엄마의 변명과 삶을 존중하기에 그녀가 나를 버릴 때마다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로 인한 고통은 이미 부모 없이 성장한 나에게 더 필요하지 않은 드라마였지만 감내했고 치유해 내 딸에게는 나는 더없이 중요하고 사랑받는 엄마가 되었고 할머니를 나를 가슴으로 키워주신 나의 진짜 엄마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난 내 엄마에 대한 미움, 증오도 끊어 내었기에 그녀가 보낸 십 오 년이 지나 보낸 친구 초대에 미련도, 상처도 없이 엄마인 그녀를 다시 잘라 내기로 마음 먹었다.
나의 딸아이는 조금만 다치거나 아프면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아픈 곳에 뽀뽀를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뽀뽀 한 번, 관심 한 번에 행복해져 다시 제 갈길을 간다.
이 아름다운 내 딸 아이를 보고 드는 엄마로서의 생각은 내 미래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혹은 이 아이가 나에게 어떤 짐과 부담이 되던 이 아이를 버리는 일은 없다고.
그 어떤 형태의 불가능한 상황에 나를 넣어도 이 아이를 불행하게 하는 일에 동조하는 일은 '엄마'라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에게 몇 번이나 버림 받을 정도의 악행을 부린 딸인가?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지만
엄마가 그렇게 느낀다고 혹은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식에게, 딸에게 그렇게 할 일도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지금 과거에 그녀와 나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누가 잘못을 했고 따질 일도 없고 필요도 없다.
세상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도 일어나고 그것을 겪든 안 겪든 돌아보고 나면 그저 기억이며 경험일 뿐.
물론 부모 자식 간의 문제지만 나와 그녀와의 사이를 부모 자식 간으로 보기엔 부재의 기억과 온전치 못한 결과들이 너무나 불편하고, 마치 다 아문 상처가 이제와 속상한 냥 들여다 보며 다시 살필 필요도 없다.
천륜을 거역하는 성실한 불행을 저질렀을 땐, 그에 따르는 댓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엄마가 없이 엄마가 되어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는 딸을 낳아 놓고도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는 여자로 남아 사는, 그런 댓가.
그녀가 보낸 초대를 지우고 그녀의 계정을 차단했다.
나의 엄마는 돌아가셨고, (할머니), 나는 엄마의 부재를 충분히 앓아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누군가의 음지에 혹은 그림자에, 소문으로 살 계획도 의향도 없다.
아니, 여름꽃처럼 찬란한 태양 아래 내 존재 고고히 알리며 아름답게 밝은 곳에서 살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엄마도, 그녀가 선택한 삶에서 평화롭기를, 그녀가 지켜내 온 것들 앞으로도 열심히 지켜가며 그녀의 진실에 충실한 삶을 살길. 그것은 미움도 증오도 아닌 진심으로 바래보는 엄마의 행복이다.
내가 이런 결정과 깨달음에 오기까지 그녀도 나라는 사람을 낳아준 사람이라면 분명 앓았을 것을 알기에.
그래도 나라는 사람에게 이 삶을, 이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고맙다고.
나는 당신을 용서했으니
잘, 사시라고.
And that’s where I found my peace 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