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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 Oct 25. 2023

Dear. Ordinary life

자랑스러운 매일의 우리에게

 

 작년에 우울증, 공황이 와 많이 힘들어 의사 만나 약도 먹어봤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다 남편이 한국을 다녀오면 어떻겠냔 말에 당시 만 한 살 반 정도의 셋째 딸아이와 한국을 가려고 하다 비행기를 놓친 일이 있다.


 내 인생에 비행기를 놓친 순간은 지금까지 딱 두 번.

한 번은 캐나다에서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또 한 번은 작년, 그것도 아직 젖을 먹이고 있던 아이와 함께여서 공항에서 울고 싸고 토한 아이 덕분에 진짜 멘탈이 가출한 줄.



사실 내년, 24년도 겨울에 남편과 나, 아들 둘과 딸이 다 함께 가는 한국여행을 예정하고 있어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올해 여름 내내 너무나 이쁘게 하루가 달리 커가는 딸아이를 보다 문득 한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은 한 번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내 애들의 '애기시절'이 안타깝단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한국에 다녀와야겠단 생각이 들어 (갑분) 한국행을 결심했다.


 아이와 함께 묵을 집(에어비앤비)도 예약하고 가족들 외에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취했다.

 

집(제법 큼)을 샅샅이 뒤져 청소하고, 옷부터 침구까지 모두 세탁, 내가 가고 없는 이주동안 남편, 아들 둘이 먹고도 남을 장을 봐 냉장고 두대를 채워놓았다.


작년에 그렇게 비행기를 놓치고 비행기를 놓친 모든 이유와 경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이런데 집요) 일단 아이들의 국적문제를 해결했다. 알고 보니 내가 아무리 캐나다 사람을 만나 캐나다에서 결혼해 캐나다에서 살 아이들을 출산해 길러도 내가 한국인이상 그 아이들을 한국아이로 신고하는 것이 법적으로 맞단 사실을 알고선 세 아이 전부, 출생신고부터 여권까지 만들어 한국사람으로 등록 완료. (울 집에서 토론토 한국 영사관까지는 세 시간 반의 운전, 게다가 한꺼번에 모든 업무를 다 볼 수 없어 지난 일 년 동안 몇 달에 한 번씩 영사관에 가 업무를 따로 봄.)


 그리고 나.



주위환경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왜 고장 났는지, 어떻게 고장이 났는지 알 길이 없는 내 허약한 정신을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의 일이었던 것 같다.

 

정신적 전봇대 같았던 할머니를 잃고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임신, 출산, 출산 이후에도 계속된 격리 시스템으로 세 아이 집에서 이 년 동안 독박 육아. 그러면서 또 노산 후, 막내 아이를 거의 이년 반 동안 젖을 먹이며 완전히 피폐해진 몸상태와 호르몬.

 딸아이를 낳으면서 완전히 심해진 내가 갖고 있는 '완벽한 엄마, 아내상'에 내 자신을 끼워 맞춰 살기 위해 온 정신과 에너지를 남편, 자식들에게 쏟은 몇 년 동안 찾기 힘들었던 '나'를 돌아보니 공황이 온 중년의 외국 사는 서른아홉의 아줌마.



 비행기를 놓친 이유에 가장 큰 문제는 '나'였고 겉으론 아무 문제 없이, 탈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내가 겪는 정신적 공황은 자갈밭에 뿔뿔이 흐려진 모래 줍 듯 더디고 거칠고 멘탈 하나만은 끝내주게 강하다고 생각해 온 내게 더없이 무거웠다.


 집에서 애만 봤다가는 나아질 길이 없겠다 싶어 막내를 낳고선 들끓는 모정에 못하고 안 하던 아이들을 두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는 일도 하고 소홀히 하던 운동(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나가보고, 셋째를 낳고 굳이 필요하지 않아 은퇴하겠다고 한 일(포르투갈 사장이 하는 비싼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서버)도 일할 사람이 없는 날 가끔 가 주는 식으로 돌아가 다시 하기 시작했다.


 

편하고 안정된 삶을 그토록 원했건만 나는 극심한 혼돈 속에서 바쁘고 힘들게 살아야 더 기지를 발휘해 내는 스타일의 인간임을 알게 됐다.


지난 일 년 동안 쓴 내 브런치를 보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많이 적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않는 나에게 진짜 필요한 말을 해 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유에도 있다.


완벽할 순 없다.

그런 불완전한 나를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끌어안고 살 사람도 나뿐이다.


살려면, 잘 살려면

일상의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상상 속의 나와, 이상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내가 적절히 조금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상태로 현실을 살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지난 9월,

난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을 오고 가는데 문제는 하나도, 한 점도 없었다.

서류도 완벽했고 지갑도 두둑했고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우울증과 공황을 겪었던 작년의 나도 없었다.


하루 다섯 끼씩 먹고, 아침 점심 저녁을 나눠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을 최대한 누빌 작정이었다.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매일 쉬지 않고 카톡 알람이 왔고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지난 몇 번 동안 캐나다에 있으면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약간 '남의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이질감도 한국에 도착해 며칠 느끼곤 했는데 이번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느낌조차 하나 없이 마치 엊그제 방문하고 또 방문하는 것처럼 마음조차 편안해 자신감은 최고에 그런 모든 상황들에 기분까지 최고인 찰나, 동행한 만 셋, 막내딸아이가 변비에 걸렸다.




어렸을 적 내 별명 중 하나는 '장이 일자'


뭔가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스타일에 배변을 늘 시원하게 보지 못하고 자주 가는 스타일이라 붙여진 별명인데 사실 아직도 그래서 음식에 예민하고, 그래서 음식을 내 손으로 하는 스타일인데 딸아이가 나와 똑같다는 사실을 왜 한국에 가서야 깨닫게 된 건지 모르겠다.


변을 못 봐 불편해 자꾸 짜증을 내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보험도 없이 한국 소아과를 찾아가 의사를 만나니 '달라진 환경, 음식, 사람, 잠자리'로 인해 예민한 아이를 이해 못 하시고 계속 어머니(나) 욕심에 맞춰 데리고 돌아다닌 어머니(나)가 역시 제일 큰 문제란다.


잡혀 있던 일정들을 취소하고 빌린 남의 나의 집(에어비앤비)에서 아이가 먹을 만한 음식들을 주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 하며 변비약을 먹여 하루 종일 변을 보게 하는데 아이가 힘들었는지 좀 일찍 잠이 들었고 그런 딸아이를 옆에 두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갑자기 난 눈물이 막 나기 시작했다.


딸 똥 좀 닦았다고 울 일?


 깊이 잠든 아이를 확인하고선 같은 건물 안에 있던 편의점에 내려가 카스맥주를 두 캔, 훈제 계란에 소시지, 라면을 사들고 올라와 시원하게 혼맥을 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


익숙하다.





빌린 남의 나의 집 근처 백화점 역 문


아이의 상태는 한국에 있는 이주 내내 비슷했다.

적당히 잘 놀면서도 속이 불편한 때가 오면 짜증을 많이 냈고 잠투정도 심하게 했다.

하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완벽하게 다는 아니지만 서투르게 이해하는 한국말과 한국말 사용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즐겁게 해 주는 딸 덕분에 급하게 한 약속 취소도 만나자고 해 놓고 이행하지 못한 약속들에게도 미안했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아이 덕분에, 빌린 남의 나의 집 근처를 홀로 유유히 유모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차분한 날도 보냈고 한국에 살았다면 이랬을까, 하는 상상도 잠시 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그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God doesn't give you what you want. God gives what you need.'

-신은 네게 네가 원하는 걸 주시지 않아. 신은 너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뿐이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한국에서 제동을 건 다름아닌 딸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아이가 변기에 앉아 엄청난 변을 보았다.

아이의 엄청난 변(ㅎㅎ)을 보고 아이를 깨끗하게 목욕까지 시켜 나와 로션을 발라주고 잠옷을 입힌 다음 잠시 멍해 있다 그제서야 안도가 되었는지 혹은 갱년기가 오는지 요새 툭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나는 아이를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아이에겐 너무나 고된 여정이었음이 분명하다.

집에서 토론토 공항까지 세 시간 반. 공항에서 기다리는 세 시간.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까지 열여섯 시간. 인천공항에서 내려서 이민국 들리고 짐 찾는데 두 시간. 공항에서 목적지까지 또 한 시간을 타고 날아간 엄마의 고향은 엄마의 고향이지 아이의 고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한국 밥을 못 먹는 아이를 탓하던 내가 아이를 안고 펑펑 울자 처음엔 뭣도 모르고 "엄마, 와이?" 하던 아이가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나를 안아주더니 지도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자 그제야 이렇게 울면 안 되겠다 싶어 진정한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Thank you so much, Rosie(딸 이름), for coming with me to Korea. You are my best friend!"

-딸, 엄마랑 한국에 가줘서 너무 고마워. 넌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야!


아이가 그랬다.


"I know!"

-나도 알아!


애의 답에 웃겨 울다가 웃었다.



변비때문에 힘든 아이 때문에 나도 좀 힘들었지만 가족들을 만났고 친구들도 만났다.

먼길이었지만 문제없이 다녀왔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쇼핑도 많이 했다.


여하튼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쁜 딸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이주간의 한국여행에서 돌아와 시차적응하는데 걸리는건 이주 정도.

하이라이트 없이 무미한 영화처럼 매일 하던 일들과 일상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조명도 관객도 없는 맘대로 되지 않는 매일의 조금은 지루한 삶을 내 삶으로 안고 묵묵히 살아내는 우리에게 작은 박수를 보낸다.



Dear. Ordinar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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