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게 내미는 손의 소중함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나면 주변 인간관계가 정리된다고 했던가. 암 투병을 하면서 그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환우들이 모인 곳에서도 주변인에게 상처받은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여기에 관해 내가 겪고 느낀 것에 대해서 기록해보려고 한다.
먼저 암 진단을 받으면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주변 사람에게 알리게 된다. 처음에 진단을 받으면 이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정말로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이 꺼내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다가 점차 이 과정이 익숙해지게 되고, 나는 내 나름의 패턴을 만들었다.
할말이 있어 - 진지하게 들을 준비를 시키고
건강검진을 했는데... - 건강에 관련된 일이라는걸 암시해서 충격에 대비하게끔 한다.
암이래 - 본론
초기이고 치료 하면 괜찮을거래 - 안심시켜서 부담스럽지 않게 하려는 부연설명
펑펑 울며 오열하던 친구,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친구, 따뜻한 위로를 건네던 친구 등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첫 반응이 이후의 행동과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았다. 가깝다고 믿었던 사람의 말에 상처받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그 상처를 치유받았다.
암과의 싸움은 장기전이다. 대부분 몇 년에 걸쳐서 해야 하는 아주 기나긴 싸움이다. 많은 경우에 환자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일상을 잃어버린다. 더 이상 내가 사회의 일원이 아닌 것 같고,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만 같고, 좋아하던 취미나 활동 중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매일같이 보던 직장동료들은 삶에서 한순간에 잘려나가고, 같이 테니스치자 러닝하자 미술관가자 하던 친구들에겐 더 이상 내가 무언갈 함께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는 친구들이 보이고, 그들은 결국 그 첫마디를 고르지 못해 연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필요한 건 대단한 위로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암은 장기전이다. 새로운 진단을 받았거나 무슨 변화가 있지 않는 한 매일같이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필요한건 그저,
"잘 지내?" "컨디션은 좀 어때?" 혹은 "이것좀 봐 ㅋㅋㅋㅋ 너무 웃기지" "뭐해?"
같은 그냥 시시콜콜한 이야기.
'같이 하기엔 몸 안좋으려나.. 안되겠지' 라고 걱정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대신,
"이거 재밌다던데 같이 보러 갈래? 몸 언제쯤 나아질거같아?" 라고 같이 계획을 세워주는 것.
혹시라도 이 글을 암환자의 주변인이 읽게 된다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알려주고싶다.
사실 나도 과거에 이걸 잘 했던 것 같진 않다. 누군가 힘든 소식을 전했을 때 진심으로 위로하고 같이 아파하기는 하지만, 그 후로 더 챙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너무나 서툴렀다.
내가 마음이 많이 약해졌구나 깨달았던 때가 있다. 얼마 전 병원 다른 과 협진 외래를 보고 나오다가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했던 걸 간호사분이 잡아주셨다. 그러고는 괜찮냐며 내 등을 쓰다듬어주셨는데 그 손길이 너무나 따뜻했다. 아마도 암환자가 잘 방문하지 않는 과이다 보니 젊은 암환자인 내가 안쓰러워보이지 않았을까. 유난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렸고, 진료실을 나와서 한참을 펑펑 울고말았다.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그리고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다가와서 도움을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한번씩 안부를 물어주는 것 만으로도 좋다. 작은 관심이 누군가에겐 큰 위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