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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그린 Sep 08. 2023

프롤로그 + 1

-하루에 하나씩, 물건과 이별하기 




결혼을 하기 전, 나는 서울 서쪽에 있는 동네에 살았다.

방 3개짜리 32평 아파트, 식구는 다섯 식구. 

나는 여동생과 함께 부엌 옆쪽 방을 썼다.

집에서 '오롯이' 내 소유인 물건은 책상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준비하면서 하나하나 내 취향대로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게 16년 전.

21평짜리 방 3개 아파트를 채우기 위해 나는 참 분주히도 백화점과 쇼핑몰, 남대문 시장과 용산전자상가를 쏘다녔다.


그 사이 두 번의 이사가 있었고,

지금 나는 거실 한켠에 놓인 내 책상에 앉아 집안을 둘러본다.


결혼 전 부모님과 살았던 집과 똑같은 구조의 나의 32평 아파트는,

온갖 물건들로 가득하다.

아이들 방에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물건이 거의 내가 보고, 읽고, 사용하는 물건들이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이 많은 물건들을 보면서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대체 언제 나는 이 많은 것들을 사들인 것일까.

이것들의 구입 비용을 모두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종종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은 내 머릿속과 마음을 복잡하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집안 곳곳을 들여다봤을 때 편안하고 즐거울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끝에 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비워내기로 결심했다.

그 시작은, 사진 속 연분홍 도자기다.


이건, 결혼을 준비하면서 엄마와 2001아울렛 모던하우스에 들렀을 때 구입한 화병이다.

한 번도 꽃을 꽃아 본 적은 없고, 그저 거실장 한켠에 올려두고 바라보기만 한 게 16년째.

뉴욕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온 친구는 내 신혼집 집들이에 왔을 때 이 도자기들 들고 한참을 세세하게 살펴봤었고, 나는 그게 참 기뻤었는지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내 안목을,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에게 인정받았다는 그런 기쁨일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큰 쓸모는 없지만, 딸기우유처럼 부드러운 핑크톤 바탕과 파랗고 청초한 꽃들이 예뻤다.


하지만 이제, 이 화병과 안녕, 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신혼 때 그때의 유행에 따라 꽃 그림이 많던 내 살림과 함께 구입한 이 꽃병은 

지금의 심플하고 내추럴한 우리 집 분위기와는 딱히 어울리지 않으니까.

16년이면 참 오래도 본 것이니까.


이 화병이 비싸든, 값싸든. 유명한 사람이 만들었든, 공장에서 찍어냈든.

어쨌든 나의 삶에 속해 있던 시절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씩 비움을 해나가며 그 물건과 관련된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아주 쓸모없는 것이라 재활용으로 처리되는 것도 있을 테고,

굳이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그 기억이 보잘것없어 지나쳐 버릴 때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일 년 뒤 가벼워질 나의 집과 편안해질 나의 시선과 사라질 잡념들을 기대하면서.


지금 봐도 어여쁜 이 화병은, 기증할 물건을 담아둘 봉투로 옮겨둔다.


분기별로 모은 물건들은 지금껏 기증해 온 굿윌스토어로 보내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해 줄 생각이다.


이로써, 오늘의 비움은 완료. 

조금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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