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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그린 Sep 09. 2023

2. 오늘은, 컵

-하루에 하나씩, 물건과 이별하기


대부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혼수 품목에 있지만,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컵.

물컵도, 커피잔도, 맥주잔도, 와인잔도. 액체를 담을 무언가를 나는 구입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딱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밥그릇, 국그릇, 접시들은 영등포 롯데백화점과 구로의 애경백화점에서, 냄비들은 엄마가 김치냉장고를 구입하고 받은 것으로, 후라이팬은 코스트코에서, 국자와 뒤집개, 냄비받침 같은 것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했다. 칼도 아마 코스트코에서 구입했던 것 같고.

이 중 대부분의 부엌살림들은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다. 

후라이팬은 코팅이 벗겨져 벌써 여러 번 다시 구입하다 스탠팬으로 정착한 정도고,

나중에 손님용 접시와 커피잔 세트는 엄마가 선물로 사다 주셨고. 또 예쁜 접시 몇 개는 동생이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코렐에서 몇십 개의 물건을 구입했었는데 나중에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택배를 풀었더니

대여섯 개가 불량품이었던 것도 지금까지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라면 당장 환불받았겠지만 그때의 어리숙한 나는 그걸 그대로 싱크대에 넣어두었고

지금까지 마감이 매끄럽지 못한 코렐 그릇을 찬장에서 꺼낼 때마다 내가 구입한 물건들을 포장했던 그 직원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고는 한다. 

아무튼.

컵이 없이 신혼 생활을 시작한 나는 곧바로 집들이를 하며 집들이 선물로 '컵'을 콕 찍어주었다.

사람들이 선물로 가져온 컵은 다양했다.

예쁜 동물 그림이 그려진 파란색, 주황색 머그컵을 가져온 친구도 있었고.

레이스를 떠오르게 하는 예쁜 커피잔 세트를 가져온 친구도 있었고.

톡, 치면 깨질 것처럼 얇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와인잔을 가져온 친구도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한 사람이 지정한 브랜드 매장에 가서 각각 물컵을 사 왔는데, 모양은 같고 색이 다른 그 컵들은 지금까지도 아껴 쓰고 있다. 문제는, 아껴 썼어도 벌써 여러 개 깨 먹었다는 데 있지만.

돌아보면 친구들이 가져온 선물 상자를 푸르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떤 것도 상관없이, 그냥 '컵'을 선물해 주면 된다는 주문은 어쩌면 어려운 요청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각각 '그렇다면 나는....'하고 선택한 컵들은 정말 다양했고, 덕분에 내 찬장은 단조로움을 벗어난 조금 더 유쾌한 주방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오늘, 저녁을 먹은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다가 문득 오늘은 컵 한 개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바로 실행으로 이어져, 하얀 도자기 컵은 재활용 통에 넣어졌다.

손으로 설거지를 할 때는 깨끗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컵 곳곳에 검정 얼룩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워낙 무심한 편이라 그냥 사용했지만, 아이들은 그 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담아 마시기 찜찜한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며, 그러한 물건을 집에 두지 않는 게 어쩌면 내가 하루에 한 가지씩 물건과 이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분리하고, 이별하기.

쓸 만큼 쓴 컵이다. 

오늘은 이렇게 나의 주방이 한 뼘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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