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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가져갈 준비물을 지금 말한다고?

-밤 11시야 아들. 다이소도 문 닫았다.

by 딥그린



예전 아이들 초등학생 때에 비하면 중,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딱히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이랄 게 없다.

첫째가 초등학생 때였을 때와 둘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또 달라서 언젠가부터 미술 준비물이라던지 소소한 악기들 같은 것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 같다.


라떼는, 을 생각해 보면 서예 도구가 준비물이었을 때 책가방에도 준비물이 다 들어가지 않아 보조가방을 들고 그 안에 먹물과 벼루와 먹과 붓과 못 쓰는 수건과 토시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화선지도 사서 학교에 가고는 했었는데 말이다. 그런 날 비까지 내리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아, 힘들었다 란 말이 절로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내일은 중간고사다.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오늘 풀어본 작년 기출이 너무 어려웠다며, 정말 큰일이라며 몇 문제를 더 풀어봐야겠다고 방으로 들어간 아들이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벌컥 하고 문을 열고 나오더니 집안의 온갖 서랍들을 열어보기 시작한다.


그 손놀림이 너무나도 다급해서 뭘 찾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가 형 방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대체 뭐가 필요한지 물었더니 컴싸를 찾는다고 한다. 그 와중에 남편은 컴싸가 뭐냐고 묻고는 아, 컴퓨터사인펜. 하고 혼자 답을 하고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같이 컴싸를 찾기 시작한다.


1학기 기말고사 때 분명 컴퓨터사인펜을 두 개 사다 주었던 것 같은데.

잃어버린 건지, 누굴 준건지 집에는 컴퓨터사인펜이 없다.


오늘 편의점도 여러 번 가고 어제 다이소도 갔다 왔으면서 월요일 시험 볼 때 컴퓨터사인펜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못한 건지.


결국 남편이 맥주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들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그나마 내일 아침에 찾은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라는 주옥같은 말을 남기고서.

(우리 집 아들은 학교 코 앞이 집이라 항상 교문 닫기 30초 전에 등교를 한다. 이런 애가 신발 신으면서 필요한 걸 달라고 말하면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기 마련이다.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은 고백이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 지각을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 버릇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적어도 5분 전에는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니.)

게다가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품목이니 그 또한 얼마나 다행이고.


챙겨야 할 준비물이 많지 않은 시대에 아들을 키워 그나마 나의 삶의 난이도가 조금 낮아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 아침, 우산을 챙겨가라는 내 말에도 괜찮다고 등교한 아이가 결국 폭우에 쫄딱 젖어 귀가한 기억도 나고 (아이가 비에 젖는 건 상관없다. 제가 택한 일이니. 그러나 가방 안에 든 책들은 어떻게 할 건데, 아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도서관에 간다고 현관까지 나가서는 본인의 도서관 출입증을 달라고 말하는 아들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아들은 도서관 출입증이 원래 없다. 아예 없는 출입증이 필요하다고 엄마에게 달라고 하는 건 뭔데 아들.)


물 마시러 나온 아이에게 내일 등교 전에 컴싸 없는 거 알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하고 물었더니 무심히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애들 있어. 빌리면 되지. 아님 선생님도 갖고 계실 거야. 그러곤 방으로 들어간다.


아, 너한테는 그렇게 쉬운 거였니.

분노의 타자를 치고 있던 내 손이 괜히 머쓱해진다.


(이미지: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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