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째를 키우면서 많이 한 말 중 하나는 "첫째 때는 이렇게 아기인 줄 모르고, 이 나이면 다 큰 앤 줄 알고 키웠어." 이 문장인 것 같다.
큰애가 세 살 무렵이었나. 약속이 있어서 세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명동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운전을 할 줄 몰라서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했고, 비상용으로 아기띠를 챙겨 갔다.
당연히 세 살 아이니까, 아이는 걷다가 짜증을 내기도 했고, 계속 안아달라 졸랐고, 결국에는 떼를 쓰고 울었다.
중고등 학생을 키우는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당연한 일인데.
아구, 힘들구나, 안아줄까? 아니면 엄마도 힘드니까 우리 쉬었다 갈까? 뭐 재밌는 거 없을까? 이렇게 넘어갔을 텐데. 그러다 너무 힘들면 우리 그냥 집에 갈까, 하고 돌아왔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융통성도, 여유도 없는 어린 엄마였다.
엄마 힘드니까 걷자, 걷자, 하다 나중에 아이가 울자 짜증을 내며 혼을 냈었다. 이러면 같이 못 다닌다고. 왜 자꾸 울고 떼를 쓰냐고. 아이를 구박하면서.
그 조그만 세 살짜리 아이가 뭘 안다고. 그저 엄마가 나가자 하니 어딘 줄도 모르고 따라 나온 아기였을텐데.
나는 정말 그때 세 살이면 제법 큰 애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큰애를 키우면서는 늘 긴장했던 것 같다.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이게 맞나 계속 확인하고, 또 뭐가 더 있나 찾아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그렇게 지냈었다.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인 줄 알았다.
유치원이 얼마나 중요한 땐데. 초등 때 이거 놓치면 안 된다는데. 중학교 때 이 정도는 해 놔야 한다던데.
그 말이 틀린 말들은 아니지만 내 기준을 세워서 찬찬히 맞춰가면 될 일들을 혼자 조바심 내기 일쑤였고, 그래서 아이를 내 불안으로 인해 다그치고 몰아세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둘째는 달랐다.
덩치 큰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 집 막둥이고, 엄마 눈에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같다.
(이렇게 징그러운 아기가 어디 있나 싶겠지만, 엄마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씌어 있는 게 분명하다.)
공부를 시키고 학원을 보내는 데도 나름의 요령이 생겨서 얼추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도 되겠다, 하는 지점들도 생기고, 큰 아이 때 효과가 없었던 학습이나 시행착오가 있었던 과정은 요리조리 피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게 크게 효율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깝고 괜히 했다 싶은 학습들도 분명 거기에서 큰아이가 얻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가 효과를 본 커리큘럼이 둘째와는 맞지 않아 오히려 괜히 따라 했다 싶을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날 때 첫째와 둘째 엄마로서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둘째는 아이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크게 욕심내려 하지 않고, 다 가지려 버둥거리지 않게 된다.
어떨 때는 여기서 쪼금만 더 힘을 내면 좋을 텐데 싶은 아쉬움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엄마의 욕심을 따라주지 않고, 엄마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으나 결국 듣지 않는다.
그것을 이제는 알고 있고. 또 억지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더더더더 하고 아이를 끌고 간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꼭 아이의 인생에 큰 득이 될 거라는 확신도 없다.
아니, 어쩌면 엄마로서의 나의 욕심은 여전히 끝이 없고 첫째와 둘째에게 바라는 바 또한 넘치도록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니라 '쟤'가 하는 공부니.
더는 '초딩'이 아닌 애를 들볶아봐야 내 정신세계만 피폐해질 뿐이란 걸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이렇게 득도한 신선처럼 여유 있게 거실 구석에 앉아
한쪽에는 첫째를 위해 확인할 입시 요강들을 쌓아두고서
쇼츠 중독자가 되어가는 것 같은 저 핸드폰과 물아일체 된 중딩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이렇게 분노의 타자를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네 살부터 형아가 되었고 둘째는 할아버지가 되어도 우리 집 막내다.
어떤 포지션이 성장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말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문득 떠오르는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는
쌍둥이 중 한 아이는 현역으로, 한 아이는 재수로 대학을 갔고
둘 모두 비슷한 레벨, 동일한 학과의 학교를 갔으나
(고3부터 재수 과정까지 한 아이 때문에 이 어머니는 몸에 사리가 수백 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했다)
재수를 한 아이는 재수 학원에서 평생 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친구를 만났고
심지어 이 아이는 취업을 할 때 재수학원에서 만난 친구의 아버지가 도움까지 주셔서
현역으로 간 아이보다 좋은 아웃풋을 현재까지는 내고 있다고 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정답은,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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