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복자는 혼란스러웠다. 하나하나 정리해보면 그러니깐 복자는 홍양을 대신해서 이성 홍보 팀장을 만나러 왔고,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그리고 이 안에 엄청나게 잘 생긴 남자와 둘만 갇혔고.
이런 드라마 같은 상황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이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복자를 걱정스럽게 보며 발밑에 떨어진 자료들을 주워 주었다. 파일표지 앞에 ‘개미출판 홍지애’라는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 ... 정말 괜찮아요? 홍지애씨?”
‘ 홍지애?? ’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복자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아~~ 네....아니요.. 아니아니, 그러니깐 괜찮다고요.”
‘ 뭐 굳이 다시 안 볼 사람한테 내 이름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지. 뭐. 이런 남자 앞에서 김복자 보단 홍지애로 있는 게 낫지.... 홍양아~ 오늘 내가 니 일 땜방하니깐 너 이름 좀 잠깐 빌릴게.. ’
“ 네... 다행이네요.. 비상버튼 눌렀으니깐 사람들 곧 올 겁니다.”
“ 네.. 혹시.....”
“ ?? 왜 그러세요??”
복자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 혹시... 지진은 아니겠죠?... 요즘 한반도에...”
“ (풋) 아, 죄송합니다... 웃는 건 아니구요...지애씨 이야기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다. 저. 지금. 그리고 아마 지진은 아닐 겁니다.”
빈틈하나 없을 것 같던 완벽한 남자가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리면서 웃는 모습.
혈색 좋게 붉어진 볼. 시원한 입매.
너무 멋지면서도 한편, 복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마음이 저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 진짜 잘생긴 것 앞에선 다 용서가 되는구나...이놈의 외모지상주의...내가 이새벽 욕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행복은 ... 하네.. 젠장,, 좋다..그래.’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재지 말고 그녀는 ‘그냥 나를 열어버리자’ 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확 몰아쳤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 다시 만날 일 없을 사람인데.복자는 제어장치를 완전히 풀어버리기로 했다.
“ 아.. 그래도 웃을 일 아닌 것 같은데... 요즘 이래저래 조심해야 할 거 많은 세상이라고요. 지난 9월에 제가 일 때문에 부산 해운대에 갔었거든요...와 ... 근데 이게 장난이 아닌 거예요.. 땅이 흔들리는 데 와우,, 정말 온갖 재난영화가 떠오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들더라고요..근데 진짜 대박인 건 ...... ”
. . .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벽에 나란히 기대앉았다.
남자는 넥타이를 풀고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복자는 손목에 끼고 있던 고무줄을 빼서 입에다 물고 어깨까지 닿은 머리를 손으로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익숙한 손동작으로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함께 딸려가지 못한 얇은 머리카락 몇 올들이 귓바퀴 옆으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후.. 오늘 참 하루가 기네요...”
옆으로 얼굴을 돌리며 복자가 말했다. 남자는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의 얼굴이 꽤 화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
“저기요? 저기요!”
“ 아. 네.. 그렇죠.”
남자는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마음속을 들킨 것처럼 말이다. 분명 그건....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 안에 계신 분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크레인 쪽에 문제가 있었는데. 처리 다 끝나가니 @분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복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에 귀를 대고 다시 물었다.
“ 아저씨- 몇 분이라고요?”
“ 오 분요! 오 분!!”
복자는 뒤를 돌아 남자를 바라보며,
“ 오 분이라네요.~”
라고 말하며 씨익 웃으며 다시 바닥에 앉았다.
“.... 오 분밖에 안 남았네요...”
남자의 말투가 서운하다는 듯 들렸다.그리고 그는 “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시며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너무나 조용해서 침 삼키는 소리까지 민망하게 들렸다. 복자는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 와- 우리 여기 갇힌 지 얼마나 됐을... 어머? 이거 왜이래?”
전원이 꺼진 폰을 부여잡고 있는 복자.
“ 아 미팅 펑크난 줄 알겠네.. 아... 진짜...”
“ 왜? 폰이 꺼졌어요?”
“ 네... 어젯밤에 꽉 충전하고 잤어야 했는데... 술 취해가지고...아아니.. 그니깐 제 말은 충전한다는 걸 깜박했다는 말이거든요.,,,”
당황하며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는 복자를 보는 남자의 눈빛이 꽤나 따뜻하다. 남자는 왼쪽 손목에 찬 은색 시계를 바라보며
“ 지금 11시 47분이고, 여기 갇힌 지 32분 지났네요... 아까 2분 전에 안전요원이 5분 남았다고 했으니깐...50분엔 나갈 수 있지 않으까요? 그리고 전 민우성입니다. 2분 동안 한 공간에 있었는데 제 이름 안 물어보시네요?”
“ 아... 우성..씨? 제가 좀 센스가 없었네요...그죠?”
우성의 갑작스런 물음에 복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웃어 보였다. 뭔가가 그녀의 안으로 훅- 하고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근데 그게 나쁘지 않고... 낯설긴 한데, 좋았다.
‘ 내 이름 홍지애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나... 뭐 지금 와서 굳이 뭐... 그럴 필요 있겠어...’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묘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그 때
- 꼬르르르르윽 , 꼬루루루룩
“ 헉”
복자는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 길게도 난다. 길게도...’
그런다고 소리가 감추어지는 것도 아닌데...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의 침묵을 가로질렀다.
‘ 아 모른 척할까? 아는 척할까? 아....씨... '
“ (헛기침을 하며) 흠,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네요...”
“ 아... 네... 죄송해요... 초면에... 제가 워낙 생체 시스템이 직접적인 스타일이라... 배 고프다, 배 아프다, 뭐 이런 걸 너무 솔직하게...”
아무렇지 않게, 유머러스하게 말하려고 해도 자꾸만 달달 떨리는 목소리와 시뻘개지는 얼굴의 복자.... 이 사태가 수습이 되지 않는다.
제 주인이 민망해서 얼굴에 피가 나던 말던 그녀의 배 속 알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울려댔다.
- 꼬르르르르윽 , 꼬루루우우우우루룻
또 한번 그녀의 뱃속에서 정체불명의 하모니가 길게 새어나왔다.
‘ 압 씨.... 무슨 노래하냐!! 어!! 노래해!!’
‘ 문아 빨리 열려라. 열려라. 아저씨들... 어서 힘내세요. 이러다 이 안에서 꼬르륵 소리로 2절까지 부를 판이예요...’
복자의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지금 그녀의 몸엔 눈치 없이 꼬르륵 거리는 배와 그걸 민망하게 들어야 하는 귀밖에 없었다.
우성은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간절한 눈빛으로 엘리베이터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는 복자.
그녀 뒤에 다가가 우성이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려고 한다.
“ 이제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혹시 선약이 없..”
- 끼이이이익 덜컥
“ 아 두 분 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기다리던 안전 요원의 얼굴이다.
“ 여기가 9층과 10층 중간이예요.., 그래서 저희가 위로 끌어 올려드리겠습니다.”
“ 네???”
복자는 정말 이 자리에서 그대로 불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옴마나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올해가 날삼재 진짜 맞구나. 이제는 여기서 암벽 등반 해야 하는 거야? 젠장젠장젠장..’
반도 아니고 3분의 일쯤 열린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고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뽑기 인형처럼 위로 쑥 올라가야 한다는 그런 상황이었다.
“ 여자분, 그럼 여자분부터 먼저... 엇! 전....”
좁은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던 안전요원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놀라자 우성이 큰 소리로 말했다.
“ 여자분부터 먼저 나가게 돕겠습니다!!!”
“ 아... 네네네.. 알겠습니다.. 여자분 위로 손 뻗어 주세요..금방 올라오실 수 있습니다. 안전하니깐 겁내 하지 마시구요..”
“ 네네네... 나가야죠.. 으.. 죽겠네.. 진짜...” 복자는 두 손을 위로 향해 뻗고 상당히 강인한 모습으로 기어 올라가며 계속 중얼거렸다.
“ 쪽팔림은 잠시다.... 쪽팔림은 잠시다... 안 볼 사람들이다... 안 볼 사람들이야...”
“ 아... 안되겠는데,,, 팔에 너무 힘이 없는데...”
안전요원이 옆의 다른 요원과 말을 주고받자, 복자 뒤에 있던 우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지애씨,,, 죄송합니다.. 잠시만 도와드릴께요...”
하며 복자의 두 다리를 양팔로 껴안아 위로 번쩍 올렸다. 모든 그림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복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할 수 있는 게 이 것뿐이었다.
스킨 광고 속 모델 같은 이 남자. 하루 일당 주고라도 명동 한복판 손잡고 걸어가고 싶은 이 남자. 눈물 콧물 막장 시집살이 99%여도 도전하고 싶은 이 남자.
그런 남자 얼굴 정면에 엉덩이를 밀어붙이며 과감 없이 뒤태를 맡겨야 하는 지금 이순간은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았다. “ 아!!!!!.... 아니아니... 아니!! 제발...제발요...고....고마...고맙습니다..”
‘ 아,,,, 지난 주에 샀던 청바지라도 입고 올 걸...그게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이는데...’
사람이 살면서 기회가 세 번 온다던데, 그 중 하나가 그녀의 뒤로 쌩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오백만 대한민국 직장인 성공 비결, 아래에서 밀어주고 위에서 끌어준 덕에 복자는 간신히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
발아래 평평한 지면이 닿자, 복자는 12시가 지난 신데렐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실로 돌아와 쪽팔림을 알고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복자는 열려진 틈 사이로 보이는 우성을 향해 “ 고맙습니다. 정말... 먼저 가 볼께요...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며 비상구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13층, 긴 복도 왼편 세 번째 파티션에 홍보팀 팻말이 보였다.
“ 아,,, 홍보팀 팀장님...어디 쪽에 계신지....??” 복도 쪽 책상에 앉아 열심히 엑셀 작업을 하고 있던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 아, 조인성 팀장님요? 저 쪽 안에 ... 회의실에 계세요..”
“ 아! 네.. 감사합니다.. ”
복자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여직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뛰다시피 걸으면서 생각했다.
‘ 와우 - 조인성? 궁금하네.. 오늘 뭔 날이래..아침부터 줄줄이 잘생긴 남자만.,, 하긴 뭐 그 제이라는 얘도 생긴 건 뭐 멀끔하니깐 암튼 너무 늦어서 큰일이다 진짜...’
투명한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회의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밖으로 문이 확- 열어 젖혔다. 그 바람에 복자의 얼굴로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유리문이 부딪힐 뻔 했다. “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예요? 몇 시? 당신들, 개민지 매민지, 지금 제정신이야?” 복자의 얼굴 위로 느닷없이 삿대질과 끈적한 침방울들이 분사됐다. 경상도 억양이 녹아있는 어색한 사투리는 ‘솔’음으로 귀를 때렸다. 그가 설마 조인성 팀장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