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미 출판 사람들

두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 오늘 일진 뭐 같네. 아... 씨..”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자는 화장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한 블록을 더 뛰어 회색 벽돌로 외곽이 둘러싸인 ‘개미 출판’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개미출판...


작명 센스도 참.... 어지간하다.


“ 야! 김복자!!! 빨리 안 올라오고 뭐해! 너 고 팀장님 요가도 빠지고.. 정신 나갔냐?”


복자와 동갑이자 동기. 이 새벽이다.

한 여자랑 두 달 넘게 만난 적이 없는 이 시대의 진정한 개바람둥이다.

일처리 하나는 식겁하게 잘하고

친구로써도 썩 괜찮은 녀석이지만,

남자로선... 글쎄....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새털같이 가벼운 남자다.

“ 올라가, 올라가. 보채지 마.”


숨을 헉헉거리는 복자에게 새벽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회사는 그 흔해빠진 엘리베이터도 없다.)


“ 왜 이렇게 늦었냐?”

“ 급한 용무가 좀 있었다. 글고, 동기님. 내가 일일이 보고하리?”

“ 쳇.... 똥 싸다 왔구만. 너 또 장 트러블 난거지?”

“ 숙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 시끼가! ”

“ 시끼... 시끼가 뭐냐? 너 입에 문 걸레 좀 빼. 간신히, 겨우 봐 줄 만한 얼굴인데.. 입만 열면... 확 깬다고.”

“ 어쭈.... 요것봐라. 겨우 뭐 한다고? 죽을래? 어? 까불어라. 나 오늘 일진 안 좋으니까. ”

그 때 분홍색 굵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쓴 고 팀장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아침부터 거북스런 대화네요. 두 사람.. 김대리. 이대리. 회의 3분 뒤에 시작. 다들 회의실로! ”

남미 여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거대한 골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홍색 펜슬 스커트와 함께 고 팀장은 유유히 팀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 휴유... 살았다. 아침 요가 자연스럽게 패스~’

복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 너 오늘 영감님 덕분에 산 줄 알어. ”


새벽이 녹색 머그잔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


복자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시키며 물었다.

“ 오늘 아침 요가 시간, 영감님 전화 받는다고 중간에 올스톱됐잖아.”

“ 영감님, 웬일이시래? 뭔 일 생긴 거야?”

“ 그러게. 고 팀장 표정이 썩 좋진 않드라고. ”

영감님,

이 ‘개미출판’의 초대 사장님이시다.

그는 이 바닥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학연 지연 인맥 이런 것 하나 없이

오직 귀신같은 ‘촉’ 하나로 안국동 바닥 한가운데에서

출판사 건물을 45년째 지켜내며 그럴듯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일흔이 넘는 나이로

일선에선 물러나셨지만,

아직도 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 바닥에서 통하고 있다.

- 고영감이 찍은 책은 6개월 안에 백만 부 돌파한다.


출판업계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하나의 지침이다.


“ 야, 의리 없이 너만 커피 마시냐? 하나만 탔어? ”

“ 복자씨,,, 남자직원한테 커피 타는 것 강요하지 마세요... 그것도 성희롱...”

“ 쪼잔한 새끼.... ”

자리에서 일어나, 복자는 복도 끝에 있는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 꼬르륵


‘ 아침부터 거하게 뽑아내고 났더니... 속이 허하다. ’

헛헛한 배를 문지르며 머그잔에 카누 커피가루를 뿌리고

정수기 온수 버튼을 누르는데 .... 텅텅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 어라? 뭐야.... 아.... 물이 없네. ”

탕비실 문밖에 일렬로 서 있는 대형 생수 물통들이 당당히 서 있다.

‘ 아... 씨.... 이새벽... 이기적인 시끼...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갔음 좀 센스 있게 갈아놓고 가지..’

어쩔 수 없이, 복자는 문밖에 있는 대형 생수통들 쪽으로 가서

으랏차차차차......

얼굴이 시뻘개지고, 저절로 헛헛해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코어의 힘이 부족한 탓인지, 주저앉은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허리가 자꾸 아래로 쳐진다.

두 손으로 생수통 목줄을 부여잡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자꾸 입 밖으로 랩 배틀이 쏟아진다.

“ 알고 알고 알고,,,,, 아 진짜 아침부터 난리네. 장 트러블에, 쌜쭉한 양아치한테 놀림이나 당하고, 이젠 생수통까지... 윽”


앓는 소리가 비트를 맞춰가며 줄줄 새어 나왔다.

그 때,

갑자기 돌덩어리 같았던 생수통이 빈 통(?)처럼 가벼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오른쪽 어깨 위로 생수통의 감촉은 느껴졌지만,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어? 어? 어!! ”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돌려보려고 했지만 어깨 위에 올려진 거대한 파랑 플라스틱 생수통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한 걸음, 다시 한 걸음을 떼려고 할 때


“ 어머머머머, 김 대리님... 저 부르시죵~~ 오홍홍홍~~”

갑자기 홍양의 널따랗고 허연 얼굴이 나타났다.

“ 아니,,, 뭐 했어.. 이미... 아침부터 뭐 괜히 힘 빼게... 이런 거 한다고 부르냐?”


홍양 뒤로 밝은 갈색 머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복자는 자연스럽게 그쪽을 살펴보았지만, 멀어지는 뒷모습뿐이었다.

‘ 사무실 직원인가? 아님 택배 기사님? 뭐지.. 이 낯설지 않은 기분은’

귀여운 푼수 분위기를 팡팡 풍기는 홍양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 것을 그때야 확인했다.


“ 홍양, 왜 그래? 얼굴이.. ”

“ 아니,,, 아니,,,, 대리님. 방금 지나간 청재킷 남자 못 봤어요?”

“ 청재킷? 남자? 얼굴은 못 봤어. 왜?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아니,,,, 너무 너무 잘 생겼어요. 장난 아니야. 와,, 나 무슨 연예인줄 알았자나요.

옴마옴마,,, 너무 멋져... 안국동에 그런 쌈박한 남자가 있었다니.. 그것도 이 시큼털털한

출판사 안에 말이예요...꺄약!!!”

“ 홍양아, 알고, 시큼털털,,, 참... 너도 문예창작과 출신 맞긴 맞구나. 언제는 안국동 완벽남은 이새벽이라더니... 금세 맘이 변했냐?”

“ 아,,,,, 이 대리님도 멋지지만... 방금 그 남자... 그런 분위기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뭐랄까... 여기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 뭐야? 여기 세상 사람 아니면,,,, 뭐 귀신? 좀비? 외계인?”

“ 어머, 이 대리님... 아무것도 아니예요.”

갑자기 나타난 이 대리의 등장에 홍양은 잽싸게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 뭐야? 방금 그 대화들은..”

새벽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 뭐긴 뭐? 별거 아니야. ”

“ 안 그래도 생수통 빈 거 생각나서 갈러 왔는데,, 와 김복자 힘 장난 아니구나.

복자 나이만 는 게 아니고, 힘도 늘었구나. ”

“ 아,,,, 이 새끼... 고맙다. 칭찬이지... 절대 잊지 않으마. ”

- 띵띵띵띵.... 회의 시작입니다.

톡.톡.톡.

새빨갛고 기다란 팀장의 손톱이 일정한 속도로 회의실 책상을 두드린다.

이것은 그녀가 매우 긴장하고 있거나

대단히 중요한 발표가 있을 때 하는 행동이다.

회의실 안,

모두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팀장의 입술만을 바라본다.


“ 음... 여러분... 이번 겨울에 우리가 아주 따끈한 신인 작가를 작업할 겁니다.”

신인 작가... 음... 뭐 특별한 일도 아니다.

개미 출판은 1년에 한 번 정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초짜 신인 작가를 5, 6개월 동안 공동 작업하여

세상에 선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겨우 그만한 일에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할 줄이야.

괜히 쫄았나.... 싶어

어깨를 쭉 펴고 등을 의자에 비스듬히 한번 기대었다.

고 팀장은 낮은 코 때문에 살짝 내려간 분홍색 뿔테 안경을 다시 올리며 입을 열었다.

“ 음,,, 그런데 이 작업은 매우 비밀리에, 극비리에 움직여야 합니다.

작가로서는 신인이지만, 세상에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미안한 것은,,, 여러분에게도 그 신인 작가의 정체를

전부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


?????

회의실 안,

모두 사람들이 휘둥그레, 놀라한다.

이 새벽 대리가 처음 입을 뗐다.

“ 팀장님,,,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신인이긴 한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한 사람이란 말씀이신가요?”

딱딱한 인상을 주는 팀장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굳어있었다.

“ 네, 그래요. 이 대리. 여러분도 많이 당황하실 거라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네요. 사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출판사가 재작년부터 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거...

그래서 이번 기회가 우리에겐 대단히 중요합니다. ”


하늘거리는 깃털펜을 얼굴에 부벼대던 홍양이 귓가에 머리카락을 걸치며 수줍게 말했다.

“ ..... 혹시.... 남잔가요? ”


회의실 모두는 ,,,

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니?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홍 양은 민망한 표정을 한 채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 네. 남잡니다.”


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새벽 옆에 앉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장 기자가 물었다.

“ 팀장님, 그럼,,, 그 친구.. 영감님이 추천하신 사람인가요?”


회의실 모두 집중,

벽에 걸려 있던 시계의 초침만이 띡띡띡띡 움직였다.

“ 당.연.히. 영감님이 추천하신 분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나, 이새벽, 홍양, 장기자 모두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추천이라...

영감님이 이제껏 추천한 작가들 중에 신인이 있었던가 ...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건 없었다.

“ 장르는 어떤 쪽인가요? 팀장님. 함께 작업을 해야 하는 정도는요?”

“ 대게는 미스터리 쪽인데... 꼭 그 스타일이라고 한정하긴 어려워.

그리고 작업은 최대한 작가 위주로. 우리 쪽에선 검열이나 교정 정도로만.

사람이 많이 달라붙을 수 없어. 지금 작가 작업들도 진행 중인 사람들은 빼고.

나랑 복자씨. 이렇게 두 사람만... ”

뭣이??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안 모든 시선이, 복자와 고 팀장을 번갈아 보며 움직였다.

오늘의 일진이 이렇게 결국 마무리되는 건가.


“ 흥분하지 말자고. 그리고 김대리.. 미팅 있으니까. 5분 뒤에 내 방으로.”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팀장은 말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 이상. 회의 끝.”


다시 총총총,

분홍색 펜슬 스커트가 좌우로 흔들리며

회의실 밖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 김 대리, 고생하겠네. 팀장이랑 공동작업 예전에 해본 적 있잖아. 행운을 빌어.”

며칠 째 머리를 안 감았는지,

기름기마저 사라진 덕수룩한 머리를 한 장기자가 털털히 웃으며

복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니 일 아니라 이거지. 웃음이 나와. 그지?


“ 선배, 어떡해요. 작년에 팀장님이랑 공동작업 하고 나서 장트러블 정말 심해지지 않으셨어요?

어떡해.... ”


어떡하긴. 이제 위에 트러블이 올 차례겠지.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홍양이 울상을 한 채 징징거렸다.


“ 됐어...됐어... 어찌 돼긋지... 영감님이 추천한 작가라면 뭐 글 하나는 기똥차게 쓰겠지... ”


그 때, 회의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 저, 여기 고현정 씨 ....계신가요?”

고현정? 고팀장의 이름이다.

“ 어머어머,,, 아까 그분이시다!!!”

홍양이 목소리를 숨죽인 채 반짝거리는 동공으로 말했다.


“ 뭐?? 아!! 넌 ... 그...??”

반쯤 열린 회의실 문틈으로

오늘 아침, 안국동 , 화장실 , 그 양아치 얼굴이 들어와 있었다.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갈색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남자의 눈동자는 매우 진한 갈색이었고, 대책 없이 맑았다.

‘ 어린 애구만.. 완전히... 솜털이 보송보송..’

“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어쩐 일이세요?”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 제발, 화장실이라. 말하지 마라.... 너 말하면 진짜 양아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녀석 쪽으로 걸어가는 복자를 새벽은 골똘히 쳐다보았다.

의심의 눈빛을 한 채 말이다.

다행히, '화장실의 남자'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화장실 거울에서 본 적이 있는

야비한 미소만 지을 뿐, ‘화 장 실’ 이란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 그래도 쓰레기는 아니네.'


“ 고현정 팀장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혹 시 그 쪽 이 알 려 주 실 수 있 나 요? ”


어쭈,,, 요것봐라.

협박이야? 부탁이야?

복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남자 앞에 서서 팀장님 방으로 앞장섰다.

뚜벅뚜벅...

남자의 묵직한 발소리가 복자의 뒤를 따라왔다.

똑똑똑....


“ 들어와요. ”


고 팀장의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어??!”


팀장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 두 사람. 벌써 만났네. 작가님. 시간이 칼이네. ”

'뭐? 작가?? 누가?? 이 양아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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