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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냉털의 시작

by 오 광년

냉털은 ‘냉장고 털기’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로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히 멋들어진 요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과거의 유행과는 결이 다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료 내에서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를 훑는다. 유통기한이 어제인 두부와 시들거리는 대파를 꺼내든다. 냉동실에 다진 쇠고기 같은 건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아래쪽도 열었다 닫는다. 컵라면 틈 사이에서 숨어있던 참치캔을 운 좋게 찾아냈다. 고작, 참치캔인데 보물 하나 찾은 기분이다. 실없이 혼자 웃다가 설탕과 고춧가루, 후추를 꺼낸다. 칼질 뒤에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으면 마파두부 비슷한 요리가 완성된다.



이 20분도 채 되지 않은 일련의 과정이 주는 뿌듯함은 꽤 크다. 그럭저럭 한 끼를 해치웠다는 표현은 부족하다. 반찬통에 있는 반찬으로만 뚝딱 때운 것도 아니고, 먹고 나면 괜히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배달 음식도 아니다. 냉장고에 대기하고 있던 식재료를 알뜰히 해치웠으며, 척척착착 과정을 통해 한 그릇의 요리로 완성시켰다.



웃긴 것은, 단순히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우는 과정뿐만 아니라 듬성듬성 비워지는 냉장고의 빈자리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요리금손이 아닌 나로서는, 깊숙이 들어간 재료와 반찬통은 곧잘 잃어버린다. 바로 코 앞에 있고 손이 닿는 위치에 있는 것들이 만만하다. 공간이 생기고, 안 보이는 게 보인다. 메뉴 선정이 주가 아니라, 남은 재료 위주로 메뉴를 끼워 맞추게 된다.


사는 게 먼저가 아니고, 주어진 것에 집중한다.


그 별거 아닌 과정에 익숙해지면, 생활패턴도 사고방식도 점점 확장된다. 내가 가진 인생의 재료와 유통기한이 오늘인 바로 지금을 말이다. 복잡한 생각도 단순해진다. 답은 늘 심플하니까.


완벽한 재료의 세팅이 늘 최고의 맛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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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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