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24년.
마음과 몸이 모두 축이 났었던 시간.
6월 지인의 소개로 사주 상담가와 전화 상담 예약을 잡았다. 서울에서 잘 나간다는 상담가는 특이한 별칭(OOOO)으로 활동했다. 그와 상담하려면, 예약하고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책도 냈고, TV 유명 예능 프로에도 나왔다. 기대감은 점점 커졌다. (어리석게도)
3개월이 흘렀고, 전화 상담으로 약속된 날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2시로 전화 약속을 잡았었고, 나는 삼십 분 전에 뭘 물어봐야 할지 질문을 나름 정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은데 그때의 나는 사뭇 진지했다.
기다림이 문제였나.
시계가 고장이 났나.
2시에서 10분이 더 흘렀다.
이미 상담비를 지불한 나는, 아니 그것보다도 그 유명하다는 상담가의 조언이 절실했던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저장된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나 : 약속 시간이 좀 지났는데요. 제가 전화를 해야 하는 건가요? 아직 연락이 없어서요.
문자를 보낸 후, 답장이 왔다.
< 많이 급하신가봐요? >
잉?
많이 급해?
지금 전화하겠다, 아니면 손님이 전화하시라, 죄송하다, 그런 말이 아니라 많이 급하냐고?
느낌이 쎄했다. 첫 단추부터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 그래도 여기까지 기다렸는데 파투내기는 그렇고, 원래 이 사람 말투가 그런가 싶어서 넘어가기로 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나는 굳이 찍어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생년월일 보내주세요>
생년월일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왔다. 네, 짧은 대답이 오가고 자신감이 가득 찬 목소리가 내 인생 그래프에 대해 짧게 읊었다. 남자만의 방식으로 사주 그래프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던 모양이다. 생년월일을 넣자마자, 뭔가가 툭 하고 나오는 모양인지. 3개월의 기다림과 그것보다 더 길었던 몇 분까지 더해 기다린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그 짧은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략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덜컥 겁을 먹었으니까.
워낙 그다음으로 이어진 남자의 말이 내 뇌리에 팍 박혀 버려 사실 그 전의 말들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 뭐 하시게요? >
--- 네, 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 아, 작가요. 네. 굶어 죽으실려면 하시든가요..>
실제로 그가 한 말이다.
그 문장이 주는 충격은, 참 뭐랄까. 뒷통수에 망치 꽝.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뒷통수는 보통 아는 사람이 치는 거 아닌가. 얼굴도 모르는, 지금 막 통화를 한. 물론 내가 돈까지 주고 생년월일까지 말해다 준 사람이긴 하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듣기 위해 돈을 주고 3개월을 기다리고 간절히 전화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아주 재수가 없는 날,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뱉은 침에 맞더라도 이 정도로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시뻘개졌다.
--- 네?
나의 짧은 반문 뒤에도 그는 십여 분 정도 그 나름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자신이 돈에 해박한 사람이라 했다. 대치동 어느 원장과 친하며, 자기 주변에 얼마나 부자들이 많은지 강조했다. 머리가 얼얼했다. 뱃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뭐,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어? 라는 판단을 먼저 했어야 했음에도 나는 겁부터 먹었다. 그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힌트를 주고 있었는데도 내 머리는 바보였다. 바보 멍텅구리.
걱정이, 두려움이 산처럼 쌓여서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당시 나는 그 낯선 남자의 손가락 힘만으로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그는 몰랐겠지만.
그의 말은 내게 그러했다.
다행히. 그가 한 “ 100억 이하는 부자로 안 봅니다.” 라는 말에서 나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웃음이 났다. 그는 내 웃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머리 위로 얼음물이 쏟아졌다. 아, 나 지금 여기서 뭐하냐.
현. 타.
세게 왔다.
불쾌하고, 황당하고, 기도 차고, 한심스러우면서도 대단히 찝찝했다.
통화가 끝나고 일주일이 흘러도 그 기분은 유지됐다.
꽤 오랫동안.
변기 뚜껑을 덮은 채로 큰 일을 본 기분이었다.
말이 주는 무서움이 얼마나 큰 지, 다시 한번 놀랍도록 경험했다.
그리고 며칠을 더 그러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어가 경주 어느 까페 사업을 시작 했다는 자신의 후배를 붐업 시키는 글을 읽고 마무리했다. 부자가 될 준비가 될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다는 그의 마지막 글을 읽고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나는 사주 공부를 좀 더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의 사주를 기가 막히게 보는 경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 것은 스스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생년월일만 듣자마자 자판기 캔 커피 나오듯 뚝딱 나왔던 그 그래프의 정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다시 글을 써보자 마음을 먹고 브런치에 하나 둘 글을 올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간이 되는 데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고 두리번거렸다. 이모티콘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게 좀 더 나아가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굶어 죽기 딱 좋다는 그 일을 하려고 나는 어찌됐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 1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현실은 크게 변한 건 없지만, 나를 끝없이 아래로 잡아끌던 구렁텅이에서는 나올 수 있었다.
최근에 기묘한 유튜브 알고리즘의 농간으로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나한테 뜨기도 했다. 순간 당황해서 관심없음을 누르려다 좋아요를 눌러버려 혼자서 으악 비명을 질렀다. 알고리즘이 뜨는 걸 막으려면 들어가서 싫어요를 눌러야 한다고 해서 꾸역꾸역 채널로 들어가 싫어요를 눌렀다. 으. 그 목소리도 듣기 싫은데. 싫어요의 효과인지, 그 이후로는 그의 채널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아직, 그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그의 그런 저주 덕분에 나는 이를 더 갈았는지도 모른다. 할 수 있을 거다. 가능성이 있다. 해보셔라. 그런 착한 말들은 자극이 되지 못했으리라.
니가 나를 알아?
니가 뭔데.
속에서 뜨거운 게 솟구친다.
그 뜨거움이 원동력이 된다면, 어떤 응원과 지지보다도 더 멀리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자리 털고 일어나서 달리게는 만들잖아.
그러니까 누군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축복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고, 그 누구도 함부로 평할 수 없다.
히어로 옆엔 늘 그를 각성시키는 온갖 빌런들이 있기 마련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