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3학년이 되었다.
죽은 누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아진 나는 1분단 셋째 줄에 앉아 있다. 담임 선생님은 여자고, 얼굴도 옷차림도 모두 화려했다. 여자애들은 아이돌 가수를 닮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처음 선생님이 되어 이 학교로 출근하셨다고 했다. 5월 어느 날, 이수현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불렀다.
“ 우리 반 캐터피 관리는 오윤이 하도록 하자. 먹이도 상자 안에 넣어주고. 물도 한 번씩 뿌려줘.”
캐터피는 과학 시간에 우리 교실에서 함께 키우는 배추흰나비 애벌레 이름이다. 평소 말이 없고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하는 내 모습이 선생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주변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나를 캐터피 담당으로 받아들였다.
캐터피는 인기가 많았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캐터피가 있는 사육 상자에 얼굴을 들이밀고 애벌레가 그새 얼마나 자랐는지에 확인하기 바빴다. 노란 알을 까고 이제야 밖으로 나온 캐터피는 몸길이가 겨우 1cm정도였다. 꿈틀거리는 것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야 미세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아침마다 분무기로 재배 상자 안에 물기를 뿌렸다. 캐터피가 붙어 있는 이파리 위로 케일을 조금 찢어 놓아주었다.
“ 안 그래도 되는데. 자기가 붙은 잎 알아서 갉아 먹을긴데.”
깜짝이야.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정희였다. 정희는 두꺼운 안경을 올리며 재배 상자 쪽으로 몸을 숙여 관찰했다. 옆에서 바라본 눈은 쌍꺼풀도 진하고 모양도 동그란데, 안경에 비친 눈은 작았다. 나는 그냥이라 답했다. 말투가 씩씩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정희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라고 말했다. 연이어 귀엽다, 우리 동생 보여 주고 싶다. 라고도 했다.
“ 동생 있나?”
“ 응. 문희라고 있다. 양문희. 이제 세 살 됐는데 엄청 귀엽다. 캐터피 보여주면 엄청 좋아할낀데.”
이른 아침 시간이라 교실에는 나와 정희뿐이었다.
하하하 그렇다니까.
진짜요. 몰랐어요. 농담 아니죠? 흐잉...
교실 밖 복도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창문으로 이수현 선생님과 아빠가 보였다. 이어지던 대화와 웃음소리가 끊어지고 잠시 조용했다. 불투명한 유리창 위로는 두 사람의 머리 부분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얼굴은 아빠가 맞는데 그 다정한 목소리는 너무나 낯설었다.
스으윽
교실 문이 열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이수현 선생님의 눈이 흔들렸다. 옆에 있던 정희가 “ 앗. 선생님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뒤에 서 있던 아빠를 힐끔 바라보았다. 살짝 위로 올라간 눈매가 언뜻 커진 것도 같았다.
그럼 갈게요. 잘하고.
얼핏 아빠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한 거 같았다. 나는 재배 상자 쪽으로 돌아서서 뿌렸던 물을 부러 다시 뿌렸다. 초록색 캐터피가 왜 그러냐고 이쪽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캐터피는 잘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손톱만 하던 크기가 이제는 손가락 마디만큼 커져서 꾸물럭 거리며 잘도 기어 다녔다. 주변에 있던 이파리에는 커다랗게 구멍이 뻥뻥 뚫렸다. 많이 먹는 만큼 똥도 많이 쌌다. 하얗던 재배 상자 바닥이 새까만 알갱이들로 지저분해졌다.
“ 야이씨. 똥 안 치우나. 캐터피 똥 밭이다. 지금.”
문성혁이 투덜거렸다. 그래, 맞다. 누나를 병신이라고 불렀던 병신같은 새끼. 그 새끼랑 하필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부리부리한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문성혁은 또래들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었다. 말도 많은 편이었는데 중간중간 존나 씨발, 간간이 욕설을 넣어 말했다. 아이들을 제 발아래 두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지랄..
속으로만 나도 욕을 해줬다. 문성혁의 느끼한 얼굴을 잠깐 봐줬다가 서랍 속에서 필통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필통을 열고 부러진 연필을 찾아 간이 연필깎기에 넣고 돌렸다. 내 할 일을 했다. 무시하고 싶은 건 무시한다. 귀를 닫고 손을 부지런히 돌렸다.
“ 야, 안 들리나. 똥 치우라고.”
철저히 저를 무시하는 태도에 문성혁은 약이 올랐다. 그 주변으로 문성혁의 무리 두 명이 붙어서서 힘을 대준다. 야, 너 부르잖아. 안 들리냐. 오윤. 말도 거든다. 속 안에서 무언가 부글거리고 있는데 나는 뾰족해진 연필심을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평정심.
수업 종이 울렸다.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고 교실에는 아이들 뿐이었다. 에잇, 하필 종이 울려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교실 뒤에 있던 아이들과 문성혁도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 야, 문성혁. 니는 욕 좀 하지 마라.”
1분단 뒤에 앉아 있던 정희였다. 평소에 여자애들한테도 거칠게 구는 문성혁한테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 잠시 말문이 막힌 문성혁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아직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 그래, 맞다. 문성혁. 니는 쎈 척 좀 하지 마라. 똥은 샘이 치운다고 했잖아. 니 쌤한테도 그리 말할 수 있나.”
2분단에서도 톡 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문성혁은 고개를 잠깐 숙이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 씨발 어디서 지랄인데!”
욕으로도 부족했는지 씩씩거리던 문성혁은 한 손으로 사육 상자를 낚아채 정희가 있는 쪽으로 던져버렸다. 으아!악 아이들이 소리를 쳤고, 정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이게 무슨 짓이야!! 문성혁!”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나서야 도착한 선생님이 화난 얼굴로 고함을 쳤다. 아이돌 가수의 얼굴은 한참이나 찌그러져 있었다. 정희의 안경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