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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18. 2024

# 5. 소리를 좇다가


 이틀간 빈 교실에 혼자 앉아 반성문을 썼다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고 할 만큼의 깡은 없었다나는 그동안 물을 주고 살뜰히 키운 애벌레를 무지막지하게 씹어 삼켰지만학교에 대놓고 반기를 올릴 만큼의 난 놈은 아니었다내 몸속에는 이해타산적인 아빠의 피가 반쯤 흐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그때 저희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실은 제 작년에 친누나가 사고로 죽었는데... ”     


그래도 나는 절대 아빠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빠의 재빠른 셈법은 강자에게 약하고약자에겐 한없이 강하다기본기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아빠의 약삭빠름을 이길 수 없다이번엔 학폭 피해자 학부모로 학교를 다시 방문한 검사 아저씨는 더 냉랭한 얼굴로 교무실을 장악했다그 앞에서 한없이 고개를 숙인 아빠는 죽은 누나를 방패 삼아 동정을 구걸했다다른 학교를 다니는 엄마도 함께 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죽고 싶었다진실로     


누나가 살아 있을 땐 그렇게 짐짝처럼 취급하더니이제 누나의 죽음은 아빠에게 더할 나위 없이 휘두르기 좋은 방패가 되어 있었다무슨 일이든 간에 어린 딸을 앞세웠다는 명제는 그에게 유익한 할인권이 되어 주었다무슨 죗값이든 그것의 절반으로 시원하게 후려쳐 주었다그 뒤에 서 있는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쉬지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비릿한 피맛이 올라왔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는 죽기가 어렵다.     

       

학폭위가 열렸고나는 곧바로 다른 반으로 분리되었다          


누나의 죽음 뒤에 숨어 나는 강전은 피했다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3주짜리 진단서를 휘날리던 자들의 아들은 이틀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그리고 복도에서 나와 마주쳐도 더 이상 히죽거리지 않았다문성혁은 나를 정말로 미친놈으로 인정해주었다열 살의 오윤은 거기서 내심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그때는 몰랐다캐터피를 씹어먹은 일의 결과는 그뿐일 줄 알았으니까.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나는 새로운 반에도 그럭저럭 적응했고캐터피라는 별명도 익숙해졌다오윤이라는 이름 외에 내가 얻게 된 새로운 이름이었다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고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충동 조절 장애와 소아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집에서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졌다누나가 죽은 이후에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은 캐터피 사건 이후에 자주 큰 소리로 다투었다처음에는 나를 피해 주차장차 안에서 싸우더니 이제 거실식탁 위듀얼 모니터가 있는 서재방 어디서든 핏대를 세웠다  

   

 정말 못 살아진짜 징글징글하다어떻게 저게 인간이야...” 

    

우당탕탕 소리에 잠이 깼는데 부엌 싱크대에 기대어 울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흐트러진 엄마의 뺨에 벌건 손자국이 있었다잠이 달아나고손끝이 찌릿했다아파트가 무너져내린 줄 알고 뒤를 돌아보니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였다아빠가 나갔다서재방에는 어질러진 이불 위에 쏟아진 책들과 깨진 컵볼펜키보드 자판 알들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그동안 숨을 죽이고 발끝을 세우고 걸어야 했던 살얼음이 이제는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하나,,,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멀리서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가리기 위해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접었다     

          

아빠의 가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일주일이 지나자 나와 엄마는 부엌에서 같이 유부초밥도 만들어 먹고피코크 팝콘을 먹으며 나홀로 집 시리즈도 이어서 보았다주말에는 영재 센터도 같지 않았다아빠와 달리 내가 영재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엄마의 의견은 달랐다     


 “ 윤아영재 센터 가고 싶나?”     

 “ 아니.”     

 “ 그래 젤로 중요한 건 니 마음이다.”     

 “ .”     

 “ 무슨 말인지 알제?”     

 “ .”     

 “ 그래됐다그럼.”     

     

엄마의 말은 짧다그래서 좋다          


 “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노.”     

 “ ?”      

 “ 하나도 안 맞는데 뭐가 좋아서.”     

 “ 처음엔 잘해 줬다그리고 몰랐지그때는.”   

            

키 큰 도둑이 전기가 흐르는 수전을 잡고 감전이 되어 뼈다귀가 보였다악악 소리를 내며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는데 우습기만 하고 무섭진 않았다엄마는 팝콘 가루가 묻은 손을 털어내고 커피를 들이켰다평화로운 일요일 저녁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집을 나간 아빠는 월요일 교실 TV 안에 들어 있었다방송 조례 때 아빠는 마이크 앞에 서서 지역별리그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형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 ... 자랑스러운 축구부 학생들은 우리 학교의 이름을 빛내고...”    

      

운동 같은 거 해서 뭐하게개나 소나 손흥민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체대 나와봤자 사범이나 코치가 다지 뭐이래나저래나 이 나라에서는 공부해서 의사 되는 게 최고고안 되면 약사나 한의사라도 해야 어느 정도 레벨을 맞추며 사는 거다알겠나윤아너는 일단 기본 머리는 갖췄으니깐 노력만 하면...   

  

끝이 없다끝이 없어


주말마다 영재 센터 가는 길에 어김없이 나오던 질질질 레퍼토리가 떠올랐다그 주인공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6학년 형들의 어깨를 토닥였고이어서 교장 선생님이 한 명 한 명에게 목에 메달을 걸어주었다화면 끝에 다소곳하게 선 채로 메달 시상 수여를 돕고 있는 이수현 선생님의 얼굴이 반쯤 나왔다 사라졌다미래의 손흥민을 꿈꾸는 개나 소는 저 손의 진심을 알까 모르겠다.  

          

방송 조례가 끝나고 나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짝인 주영이랑 함께 온도계와 위생장갑소독제가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보건실에 갖다주러 내려갔다. 1층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에 바구니를 제출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데 주영이가 찡그린 얼굴로 배를 감쌌다.

           

 “ 오윤미안한데 니 먼저 갈래나는 화장실을 좀 가야겠다.”     

 “ 배 아프나그래알겠다.”          


주영이는 급하게 1층 중앙 화장실로 뛰어갔고나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1교시가 시작된 뒤라 주변은 조용했다. 1학년 교실 창문 틈 사이로 조막만한 아이들이 손에 색종이를 들고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중앙 계단으로 가려고 방향을 트는데 이상한 웃음소리가 얼핏 들렸다  

        

뭐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운동장 쪽에서 불어오는 9월의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다배가 많이 아팠던 건지 화장실에 들어간 주영이는 아직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더는 기다릴 수 없겠다 싶어 고개를 돌리고 계단을 두어 개 올랐을 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쿵        

  

이번에는 웃음소리는 아닌데 방향은 비슷했다무언가 흔들리다 쿵 하고 부딪힌 거 같기도 했다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는데 주변이 너무 고요해서인지 대단히 거슬렸다계단을 오르던 두 발이 아래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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