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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itbe Sep 01. 2024

웃는 연습

가족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잘 웃어주는가

'가족에게 얼마나 많이 웃어주고 친절한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답이 나온다. 가족에게 오히려 웃는 게 힘든 같다.

사회에서는 타인으로부터 표정관리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의 맥락으로 기분대로는 안되니까 억지웃음이라도 필요한 순간이 있기 때문에  집에서보다 더 웃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마음은 방긋 웃어주고 싶은데 마음처럼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 내게는 늘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평상시에 무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을 좀 더 웃음으로 맞아주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에 나 혼자 때때로 아쉬워진다. 남편도 다정다감한 스타실은 아닌데 그게 섭섭할 때가 있어도 나처럼 저 사람 속마음도 그렇지는 않겠지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본심과는 다르게 웃는 얼굴이 자연스럽지 못한 이유가 뭘까. 아마 내가  재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텐션이 높은 사람도 아니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한 번 이 생각에 꽂히면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나의 어쩔 수 없는 성격을 원망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대화의 시작을  상상을 해본다. 상상만으로도 은근살짝 어색하긴 하다. 웃음이 많지는 않아도 마음만은 밝고 긍정적인 편인데 그래서 더 스스로가 안타깝다. 내 본심은 그게 아니라서 말이다. 가족이면 내 이런 속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으려나 싶지만 나 또한 남편과 아이에게 헤아리기보다 그들의 웃는 얼굴을 더 기대하는 순간이 있는 것을 보면 가족이라고 해도 속마음까지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웃는 얼굴은 다정한 사람과 연결되는 것 같다. 나는 배려심 있고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다정한 사람 쪽은 아니다. 남들이 뭐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느끼는 나는 그렇다. 탓을 하자면 가정환경이 중요하듯이 내가 자란 환경도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빠의 웃는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아빠는 늘 표정이 거의 없으셨다. 늘 정형화된 표정이어셨다. 그런데 이렇게 아빠 탓을 슬쩍해 봐도 아빠 역시 억울하실 수도 있다는 추측이 들기는 한다. 어렸을 때 아빠네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의 표정은 무표정한 사나운 할머니였는데 그 밑에서 자란 아빠니까 당연히 아빠의 표정이 웃는 얼굴과는 연결되기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나의 어렸을 때 앨범 속 아이가 떠올랐다. 사진 속에 아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저 좋은 표정으로 사춘기가 오기 전에 나는 마냥 즐거운 아이였던 것 같다. 그 사진첩 아이의 얼굴을 어른이 한참 된 지금이라도  찾아야겠다. 내 웃는 얼굴을 누가 대신 찾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책임지고 찾아줘야 한다. 노력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노력해서 가장 친절해야 할 가족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여줘야겠다. 평상시 웃는 것도 습관일 테니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웃어주면서 웃는 연습을 해보자라고 생각해 보며 얼굴을 씰룩여 본다. 눈도 따라 웃으니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다. 이대로 가족에게 웃어보자. 오늘도 속마음을 겉으로 끄집어내어 웃어 보려고 노력 중이다. 소중한 가족에게 누구보다 친절하게 방긋 웃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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