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것 같은데 슬프다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슬프고 싶진 않으니까.
어쩌면 지금은 진짜 슬픈 게 아니라 내가 감정을 구분 못하고 헤갈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묘한 감정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답을 얻으려면 늘 객관화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객관화한다고 해도 검증받을 곳이 없으니 주관적인 것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노력은 항상 필요한 것 같다.
지금 드는 생각은 최선을 다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마치 집안을 힘들게 깨끗하게 청소를 다했는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느낌이랄까. 나는 힘이 들었는데 말이다. 나름의 최선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는 섭섭하고 공허할 순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 감정 그대로 고이게 두고 싶지는 않다. 고인 물이 결국 썩듯이 감정도 흘려보내지 않으면 썩는다는 것을 안다.
아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던 중 아들을 배려한다고 했던 말 한마디가 아들은 마치 간섭과 참견으로 오해를 하고 방패로 창을 막아서 자신을 지키려는 것처럼 퉁명스러운 말로 내 말문을 막았다. 아들과의 통화는 덜컥 허무감을 줬다. 차분히 생각하니 슬픈 게 아니라 약간의 허무함이었다. 이런 감정도 빈 둥지 증후군의 일종인가.
내 보호가 온전히 필요했던 아이가 올해 성인이 됐다. 내 눈에는 아직 어린 애지만 아이가 자기가 다 잘할 수 있다고 독립적인 태도와 행동을 보이며 나의 염려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느껴진다. 나 역시 아들의 그런 마음을 모른 척하면서 무게를 보탤 생각은 없다.
드디어 나도 더불어 아이로부터 독립을 해야 할 때인가 보다. 살짝 비껴간 내 인생의 조연의 역할에서 다시금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빛나게 살기를 다짐해 본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는 또 하나의 본연의 자기 이름으로 주어진 삶이 있다. 조금 전 느꼈던 공허함을 격려로 바꿔 응원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