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Apr 11. 2024

함께 버티고 서로를 살리다

가족에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후회'가 아닐까. 아이가 이렇게 빨리 클 줄 알았다면 좀 더 자주 안아줄 걸,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맞추고 다정히 이야기해 줄 걸, 엄마 엄마 부르고 찾을 때 옆에 더 있어줄걸.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사랑한다고 더 자주 말했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모시고 여행 많이 다녔어야 했어...... 유독 가족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 잘하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많다.


세상에서 제일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빠가 암이라는 병마를 만나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면서 후회의 파도에 매일같이 휩쓸렸다. 내가 사회생활한답시고 연로하신 부모님께 아기를 맡기지 않았다면, 아빠가 자꾸 살이 빠지는 걸 보고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다'라고 타박하는 대신 이상신호를 감지하고 검진을 받게 해 드렸다면, 그랬다면 아빠는 병에 걸리지 않으셨을까. 최소한 병이 깊어지기 전 아주 초기 단계에서 발견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까. 무심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이라는 소리를 듣고, 남은 가족 모두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후회를 만들지 않고자 최선을 다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힘들게 버텨내는 아빠에게 가족 모두 매일같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끼니를 챙기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각양각색의 하트 이모티콘이 우리 가족의 폰을 매일같이 물들였고, 아빠 앞에서만큼은 모두 눈물을 감추고 다정한 미소와 힘찬 응원으로 함께 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무너졌다. 하루종일 손자를 안고 동네를 활보해도 힘든 줄 모르던 아빠의 단단하던 팔이 순식간에 가느다랗고 앙상한 마른 가지처럼 변해버린 걸 보았을 때, 아빠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져서 결국 삭발을 한 날, 아빠의 휴대폰 앨범에서 영정사진 포즈로 찍은 여러 장의 셀카를 발견했던 날. 그럴 때면 그저 풀썩 주저앉아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엉엉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을 온몸으로 겪는 와중에도 우리 중 가장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 아빠를 보며 다들 마음을 다잡았다. 수차례의 항암치료와 수십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는 내내 아빠는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의료진 한 명 한 명에게 "저를 이렇게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90도로 절하며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입원해 있는 동안은 매일같이 복도를 거닐며 유산소운동을 하거나 옥상정원에서 근육 운동을 하고 주변 환자들에게 골프 자세를 가르쳐주는 등 병원을 헬스장으로 만들며 핵인싸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아빠는, 치료 기간 내내 손주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입원기간이나 항암 직후 몸이 많이 쇠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예전과 다름없이 우리 집을 찾아 손자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전처럼 아이를 계속 안아 주지는 못했지만, 많은 시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아빠는 손자를 돌보는 일 자체를 절대 놓지는 않았다. 내가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를 보겠다 했을 때도 아빠는 "정 힘들면 얘기할 테니 그때 휴직을 해라"라고 할 뿐, 그 '정 힘들면'의 시간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저 기나긴 치료를 언제 다 받나, 아니 치료 과정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 아빠가 이 세상에서 잘 버텨주실까 걱정했던 날들이 어느새 흘러가고, 아빠는 최초에 들은 여명 3개월을 훌쩍 넘기고 예정된 모든 치료를 성공적으로 다 받았다. 그리고 매번 마음을 졸였던 정기검진 주기가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으로 늘어나며 우리의 긴장감도 희미해지고 어느덧 암 판정을 받은 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며 손자를 보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치료 중인 아빠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손자 돌보기가 아빠를 지켜준 소중한 루틴 같기도 하다. 세상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손자가 주는 에너지를 받으며 아빠는 살아야 하고 건강해야 할 이유를 매일같이 되새기지 않았을까. 어떤 복과 기적이 아빠를 살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모두에게 힘들었던 그 시간 동안 우리가 항상 함께여서 참 다행이었지 싶다.


우리 가족은 무적의 5인조!


그토록 큰 병에 걸리고서도, "내가 복이 많아서 이렇게 좋은 병실을 혼자 쓴다."며 1인실 생활에 그저 감사해하던 아빠. 비록 딸인 나는 세상 비관적이고 걱정 많은 투덜이지만, 내 아이만큼은 할아버지의 긍정 에너지를 물려받았기를 바라며,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빠! 오늘도 우리 집에 건강히 와 주셔서 고마워요. 우리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많이 사랑해요 나의 아빠.

이전 12화 나 때문에 아빠가 병에 걸리신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