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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고모, M에게

M과의 추억

by 시쓰남

25년 10월 02일 아침 06시 22분


맑은 아침이다. 아들 녀석은 오늘부터 12일까지 긴 연휴를 맞는다. 나는 매일 연휴이고. 이 연휴가 지나면 이력서를 더 열심히 넣어 보려 한다.

어제 M소개하려다 J소개를 하고 마쳤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게 나도 신기하다. 쓰다 보면 생각이 나서 이런 황당한 전개를 만들고 있다. 오늘은 M을 소개하겠다. 중간에 누가 새로 인사를 할지도 모르니 너무 당황하지는 마시라.


M은 막내였고, 위로 언니들만 2명 정도 있었나? 어머니는 대학교 주변에서 한식당을 하셨다. M은 3통에 살았다. M 집 앞을 무수히 많이 지나가 봤지만, 놀러를 가본 건 한 번 밖에 없었다. M이 학급회의 회장에 당선되고 축하 파티를 열었을 때. 난 거기 초대를 받았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나 일찍 도착해서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어슬렁거리며, 다른 친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메뉴는 삼겹살. 어린 친구들의 이 집 막내딸의 가이드를 받으며 열심히 고기를 구워 먹었었다. 난 그때 유일하게 초대받은 남자아이였고 아마 나와 M의 특별한 관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혈연관계). 그게 아니라면 나도 학급회의 임원이었기에 초대를 했을지도.


5학년 학기 내 교실에서는 쪽지가 오고 갔다. 간단한 퀴즈부터 니가 누굴 좋아하는지 조금은 예민한 이야기들까지. 그때 난 M을 내 마음의 1순위로 좋아하고 있었고, M도 그랬다. 학년말이 되었을 때 우리의 고민은 둘이 같은 반이 되지 않을 까봐 조마조마했다는 거. 끽해야 3반까지 밖에 없고, 쉬는 시간에 놀러 가면 되는데 그때는 반이 바뀌면 왠지 소원해지고 자주 못 본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1반, M은 3반. 우리 둘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떨어졌고, 나는 쉬는 시간마다 3반에 놀러 갔었다. 하지만 타반 아이가 자기네 반에 자주 온다는 민원이 접수되고, 난 그 이후로 잦은 방문은 자제했다.


6학년이면 가장 기대하는 이벤트가 있다. 바로 수학여행! 우리는 5월에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고, 난 그날 M이 내가 아닌 3반 다른 남자친구 L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M과의 이별을 예감했다. 공식적으로 이별을 통보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M은 나보다는 L과 더 많이 어울리며, 나랑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나의 수학여행은 요즘말을 빌리면 이별여행이 되어 버렸다. 모두들 신나 할 때 나 혼자 웃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했고, M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 나와 M사이에 끼어든 L이 미웠다.

그렇게 M과 소원해지는 상황에서도 난 3반을 지날 때면 언제나 M을 생각했다. 점심시간이면, 3반에서는 합창단 연습을 했다. M은 노래도 잘했다. 그래서 당연히 합창단 일원으로 노래연습을 하는 걸 보았고. 난 주변에 계속 기웃거리다, 3반 선생님께서 “너도 합창단에 들어 올래?”란 스카우트 같은 아닌 그런 권유로 친구 몇 명과 같이 합창단에 들어갔다. 나 포함 3명이었던 거 같고, 우리는 여자애들 사이에 몇 없는 남자들이 되었다. 그렇게라도 M이 보고 싶었고, 함께 해보고 싶었다. 나중에 우리는 합창 대회에도 참가했다. 수상여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내버스를 전세내서 타고 간 기억이 난다. 이건 나중에 리코더 대회를 나갈 때도 똑같았다.


난 M에게 묻지 않았다. 우리 사이가 조금씩 벌어진 이유를. 혼자서만 생각하고 내 맘대로 정리했다. 관계개선을 더 했어야 했는데 M주변에서 맴돌다 졸업을 맞이한 거 같다.

졸업하기까지 우리는 여러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여름 방학 과학탐구 활동 때, 리코더 대회 연습 때. 좁은 학교다 보니 많은 활동에서 잦은 만남이 일어났지만, 난 끝내 M과 많은 대화를 하지 못했던 거 같다. 나만의 슬픔? 뭐 이런 걸 혼자 가지고 살아갔다.

참 신기한 게 꼭 그럴 때 유행하는 노래는 내 마음을 반영하는 거 같고 그런 노래를 들을 때마다 M을 더 떠올렸던 거 같다. (이 여름 땐 임백천의 ‘마음에 쓰는 편지’) 내가 M을 참으로 좋아했나 보다. M은 우리 집 E와 똑같은 학교를 나왔다. 그래서 가끔 E를 통해 M의 소식을 정말 어쩌다 한 번씩 들었고, 동네에서는 정말 드라마처럼 지나가다 한 두 번은 볼 듯한데, 이 마저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내가 피해서 못 본 건가? 그렇게 일부러 피하고 다니진 않았는데. M은 집 앞에 바로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매번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항상 M의 집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제나 열려 있는 M의 어머니 가게를 쳐다보았다. 보이는 건 식당 풍경일 뿐, 그 안에 M은 없었다.

그렇게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어 했던 M은 20살이 넘어서야 만났던 거 같고, 그 장소는 바로 M의 집 앞 버스 정류장. 그 이후로는 싸이월드에서 1촌이 되어 종종 업데이트되는 M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M은 2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제는 만나면 편하게 옛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때 수학여행 때 내가 너무 마음이 안 좋았다고. 그래서 그 이후로 자꾸 주변만 서성였다고. 이제는 추억이 되어 나의 머릿속 한 폴더에 소중히 저장되어 있다. M은 모를 거다. 이런 나의 마음을.


M에 대해 쓰다 보니 내 머릿속은 온통 89~90년으로 도배가 된다. M과의 슬픈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닌데, 왜 급 위로받고 싶은 남자처럼 글을 전개했지 하는 마음이 들어 괜히 M에게 미안하네. 즐거운 일도 많았는데.

롤러 장이 생각난다. 시끄러운 음악, 음악박스에 DJ.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M과 친구들 여럿이 토요일 오후에 롤러장을 갔었다. (여기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동네에는 롤러장이 없어, 시내로 나가야 했다.) 신나게 롤러를 타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까지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때 목이 말라 한 약국을 들어갔고, 약사 선생님께 물 한 모금 얻어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약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말도. “얼굴에 버짐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다. 내 얼굴엔 그때 버짐 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난 매번 엄마에게 고기가 부족해서 내 얼굴에 버짐이 핀다고 항의했던 철없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너에게 고기한점 사주고 싶다.

롤러장에서 집까지는 꽤 긴 거리였고 버스로도 10 정거장 이상이 되었을 텐데, 그곳을 M과 함께 걸어왔었다. M을 먼저 바래다주고(M은 3 통이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갔던 이맘때쯤 추억이 생각난다.


M과 나는 동성이었기에 학렬을 따질 수 있는 사이였는데, 난 33대손 M은 32대손. 그래서 난 M을 고모라고 부르기도 했다. 학렬상으로도 고모가 맞으니까. 나의 5, 6학년은 M으로 인해 특별했고, 소중했다. 물론 중간중간 다른 여자친구를 좋아했고, 질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M에 대한 소소한 복수를 꿈꾸며 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난 복수 이런 거 못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악순환이 계속되는 불행만 만들 뿐이라 생각하기에.


M. 그거 아나 몰라. 3월이 오고 3월에 중순이 되면 니 생각을 한 번씩 한다. 왜 그런 지는 알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M. 나의 어린 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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