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25년 10월 07일 오전 06시 11분
지금은 추석 연휴의 중간쯤. 이런 연휴를 정말 100년 만에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그런 날들이다. 25년 10월을 기약하며 힘내라던 프로그램을 기약한다. 그 기대하던 연휴를 드디어 맞이했고, 지금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침 추석이라 군산에 다녀왔다. 가기 전 친지방문과 내 기억의 공간들을 다시 보고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실상은 집 주변만 머물다 내려오고 말았다. 그래도 둘러본 곳 1통~3통 그리고 7통 주변. (M의 집 주변과 J의 집 주변을 둘러보고 왔다). 3통까지는 큰길을 따라 집들이 퍼져 있는 구조인데, 이전과는 크게 변한 모습이 없었다. 일부 아직 소개를 못한 S의 집 주변은 집들이 허물어져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7통 주변에 살던 J의 집도 허물어졌고, 그 주변으로 새로운 길이 나서 J가 이사 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남아 다행 인건?(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조금 의문스럽지만, 여하튼 있어줘서 고마웠다.) M이 살던 예전 건물은 아직 남아 있었다. 다만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 공가 같았고 꽤 오랜 시간 머물지 않은 듯했다.
K, K 두 친구 소개까지 했었다. 두 친구들 사진이 앨범에 있어, 아직도 그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내 의식대로 친구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류가 있는 부분을 수정해야 할 거 같다. 바로 우리 동네 구조였는데. 우리 동네 메인 도로를 기점으로 4 통과 6통만 마주 보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6 통과 7통이 메인도로 맞은편에 있었던 거 같다. 지금 지도를 보고 주소를 눌러도 통은 나오지 않고 번지수만 나와서 정확하게 수정하지 못하는 점은 이해를 부탁드린다.
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O가 생각이 난다. O랑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20대 초반까지도 연락을 했었고, 만났었다. 자주 보며 연락을 나눈 사유에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 둘은 초등학생 때 같은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집과 집 사이도 그리 멀지 않았다. 2~3백 미터쯤 되었으려나. O는 4통에 살았다. 내가 5통에 살다 6통으로 이사를 갔었 어도, 우리 두 집 사이의 거리는 비슷했다. O는 막내였고, 위로는 언니들이 두 명 있었다. 오빠가 있었는지는 조금 헷갈린다. 둘째 언니는 거의 뵌 적이 없고, 첫째 언니네 부부는 뵌 적이 있다. 수능을 마친 어느 겨울이었고, 맛있는 저녁을 사 주셨고 2차로 포켓볼, 3차로 노래방에 간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단한 용기다. 처음 보는 분들과 알콜의 도움 없이 어찌 노래방까지 갔지. 열심히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추억한다.
O의 친구들 이랑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95년 늦가을 미팅을 하면서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남자의 주선자는 나였고, 여자 쪽은 O. 우리 둘은 서로 친구들의 미팅을 주선했고, 그 미팅은 2번까지 하게 되었다. 1차, 2차 조금씩 인원이 바뀌었지만, 한두 명 정도만 바뀌고 나머지는 거의 고정이었다. 그때 친구들에게 O를 처음 소개했고, 우리는 친구들의 미팅이 잘 되기를 희망하며 파트너 배정과 그 후 노래방. (딱히 갈 때가 없었다. 파트너 정하고 바로 노래방 갔다. 그 후 각 파트너들끼리의 시간, 아마 어색한 공기를 깨기 위해 노래방을 가는 게 아니었나 싶다.) 파트너 배정은 미팅의 국롤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95년 가을은 이게 가장 핫한 방식이었다.) 소지품으로 정하는 방식, 우리는 미팅장소에 여자 쪽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각자의 소지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여자 쪽 애들이 다 도착하면 이야기 도중 해당 소지품들을 꺼내 놓고, 고르게 하였다. 그래서 K랑(남)-F(여)가 되고 나머지도 각각 파트너 배정이 되었는데 유독 K랑- F만 기억이 나네. 이 미팅이 학교에 소문이 나면서 우리 반에서는 특이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수업 도중 F의 이름이 나오면 단체로 F의 이름을 부르며 교실에서 소란을 떨었다. 영문을 모르시던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 했고, 이런 이상한 단체 행동이 궁금하신 선생님들은 왜 그러냐며 우리에게 이유를 물어보시기도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F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K를 곤란하게 하는 놀이를 한동안 자주 했다. K(남)는 나중에 다시 소개를 하겠지만, 지금까지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이번 추석 때는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다음 설에는 얼굴 보며, 커피라도 한잔 같이 했으면 한다.
이렇게 O와 친구들 미팅을 시켜 준 후, 난 친구들 사이에 여자친구가 있는 놈으로 인식되었고, 옛 속담처럼 난 굼벵이가 되어있었다. 어쩜 저놈도 저렇게 구르는 재주가 있는지 다들 의아해하면서. 사실 커 오면서 여자친구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다음 남자중학교, 남자고등학교만 나와서 중간에 여자친구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했고, O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었기에 이런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었던 거 같다. 지금도 돌이켜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 및 대학교 동기들 밖에 없다. 그 외 그 공간에서 새로 사귄 여자사람 친구들은 없어서, 참으로 단순한 삶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단순한 게 아니고 대부분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학원이라도 다녔음 타 학교 여자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난 학원 파는 아니었고, 집에 가면 기대하고 고대하던 게임 해야 하는데 무슨 학원이란 말인가? 게임이 나의 친구라 그 틈에 여자친구가 낄 틈이 없었던 거 같다. O도 그냥 친구로만 생각했었다 가, 미팅을 주선하고 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레 여자친구로 발전된 게 아닌가라고 기억을 수정해 보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고. O도 여자친구 순위에 분명 있었으니까, 내가 좋아한 여자친구가 맞다.
O랑은 매주 교회에서 잠깐잠깐 보았었고, 이렇게 이성적으로 주말에 시내에서 본건 미팅주선 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가끔 하굣길에서 같은 버스라도 타면 엄청 반가웠는데, 그런 우연은 몇 번 없었던 거 같다. 우리 학교가 거의 종점이어서 나는 매번 버스 버스정류장을 볼 수 있는 자리에(타이어가 올라온 자리 바로 뒷자리를 좋아했다.) 앉아서 O의 학교 정류장에 도착할 때면 기대 반 설렘반으로 스캔을 했는데 O는 자주 보이지 않았다. 먼저 건건지? 아니면 아직 하교를 안 한 건지. 신기하게 O, K , J 모두 같은 여고를 다녔는데 셋 다 버스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얘네들 공부를 잘했는데 혹시 기숙사 같은 곳에 있었나? 나처럼 평범한 애들만 버스 타고 학교를 다니고? 담에 만날 기회가 된다면 팩트 체크를 꼭 해봐야겠다.
O랑은 수능을 마친 후 그전 보다 시내에서 자주 봤다. 영화도 보러 갔었고, 친구들과(미팅 때 만나 그 친구들 중 일부) 만나 호프집에서 그때까지는 잘 마시지 못했던 500CC 한잔 또는 음료수를 시키고, 안주로는 탕수육을 주문하며, 제법 어른티 나게, 빨리 진정한 20살이 되기를 기대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O랑 극장에 갔을 때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O랑은 사이가 예전처럼 돈독하지 않았던 시절, 어찌해서 약속을 잡고 극장에 갔고, 우린 같이 앉지도 않고 서로 옆에서 두세 칸쯤 떨어져 앉아 영화를 봤다. 그러던 중 정말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고, 그 이후의 전개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하필 O랑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냐며 투덜만 거렸다. 그 일은 바로 정전, 10여분 넘게 정전이 일어났었던 거 같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어둠 속에 홀로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것도 모르는 남처럼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빨리 영화가 상영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O의 생각까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랬다. 왜 하필 O랑 이런 일이 하며, 짜증만 내고 있었다. 그때 분명 나와 O와의 사이에 균열이 있었고,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인지도 몰랐다. 나는 부산으로 O는 전주로 대학진학을 하게 되면서 그전보다 더 많이 볼 기회가 없었고, 둘을 연결해 줄 삐삐란 것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둘의 공간적 거리를 채워 주지는 못했던 거 같다. 공중전화박스에 습기가 차도록 전화를 오래 했었고, 가끔씩 손 편지를 보내며 안부를 물었지만, 물리적인 공간의 차이는 우리 둘의 마음에 공간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대면대면 한 상태로 O를 다시 보았고, 극장에 갔는데 정전이 되었다. 그러니 뭐 아무 일도 일어날 게 없지.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 버스정류장을 몇 미터 앞에 두고 난 신호등을 건너 집으로 갔다. 그땐 그게 멋인 줄 알았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면 배웅해 주면 될 것을 휑하니 난 신호등을 건너가버렸다. 그 상황을 떠올리니 미안하네. 이런 모습을 보여 줘서 O와 나 사이에 균열이 더 커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이렇게 둘 사이는 뭐라 말하기 애매하게 계속되었다. 계륵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헤어지자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이 같기도 하고.
99년 초 겨울 방학 때 O와의 만남은 정리를 했다. 위의 노래가사처럼 헤에 지자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우리 그만 만나자고 결별을 말했고, 난 그 뒤로 커피숍을 내려와 바로 집으로 걸어갔다. O가 생각해도 웃겼을 거 같다. 둘이 뭐였다고, 결별을 이야기하는지, 그 이후 O와는 공식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고, 가끔 군대에서 기억나서 전화를 하면 어머니가 받으셔서 O와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시험기간이라는 말과 함께.
O는 나보다 더 유머러스 한 친구였고, 인기쟁이였다. 어릴 적 사랑을 풋사랑이라 한다면 O와 나의 관계가 그런 풋풋한 사이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